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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희

수필가

번화가가 끝나는 곳에 오래된 메밀 국숫집이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꽃무늬 앞치마를 입은 아줌마가 송송 썬 파와 곱게 간 무를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찬 거 맞쥬?" 간소한 상차림에 딱 어울리는 슴슴한 물음이다.

면이 나오기까지는 알맞추 시간이 필요하다. 적당한 기다림은 은근한 기쁨을 준다. 혀의 돌기를 자극하며 곧 맛볼 음식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둥근 찬그릇에 담긴 단무지를 한입 베어 문다. 사각거리는 정도가 맛의 기대치를 한층 높인다. 문득 "부처를 위한다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다"고 말한 백석*의 모밀내가 궁금해진다. 숨을 길게 들이켠다. 옆 테이블의 후루룩거리는 소리만 공간을 채울 뿐,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다.

때맞춰 중씰한 아줌마가 축축한 물기가 밴 네모 판을 들고 온다. 희부연 색깔의 메밀 면이 판 위에 수북이 담겨있다. 본연의 색을 벗겨낸 면의 탱탱함과 천연 메밀이 갖는 서늘함이 함께 느껴진다. 살짝 언 장국에 파와 무를 넣어 깊은 맛의 풍미를 더한다. 기다린 시간만큼 시장기도 컸나 보다. 국물이 넘칠 만큼 한 움큼의 면을 덥석 집어넣었다. 흠씬 젖은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리는데 눅눅한 기억 한 가닥이 젓가락 끝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아버지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막내딸과 둘이 사는 홀앗이살림이라 그러기도 했지만, 세상과 불화한 탓에 은둔자처럼 밖에 나가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아버지는 밥벌이를 위해 외지로 나간 엄마 대신 내 도시락을 싸고 빨래를 하며 지루한 하루를 겨우겨우 넘겼다. 중년의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마누라의 고된 노동의 대가로 사는 가장의 참담한 실존은 어떠했을까. 창백한 아버지의 얼굴은 굵은 빗줄기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노상 구겨져 있었다.

가난한 집 밥상은 금욕적이다. 털이 숭숭 박힌 돼지비계도, 뾰족한 가시가 박힌 생선도 없다. 아버지가 차려낸 밥상도 그러했다. 시든 푸성귀와 묵은 된장을 멀겋게 푼 쿰쿰한 찌개가 날이면 날마다 올라왔다. 어쩌다 칠이 벗겨진 소반에 둘둘 만 계란 요리라도 올라오는 날이면 엄마가 생활비를 보냈다는 뜻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한 달은 버틸 수 있다는 아버지의 염치없는 속말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더운 날이었다. 밖에서 들어온 아버지는 다짜고짜 "나가자" 한마디 툭 던지고 채근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나선 발걸음이 가벼울 턱이 있나. 입을 쑥 내밀고 휘적휘적 걷는 아버지 뒤를 느릿느릿 따라갔다. 큰 사거리를 지나고 작은 골목을 서너 차례 꺾어 도니 시내에서 제일 번화한 중앙 통 거리가 나왔다. 아버지는 힐끔 나를 보더니 식당 문 앞에 걸린 주렴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출렁이는 주렴을 피해 들어서던 나는 멈칫했다. 아버지의 얄팍한 주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밥때가 지난 식당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던가. 나무 탁자가 놓인 식당은 크지 않았고 내부는 적당히 어두웠다. 더운 날씨 때문인가. 송골송골 땀이 맺힌 아버지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아버지는 주방 쪽을 향해 "모밀 소바 한 그릇만 주시오" 크게 소리쳤다. 주인장이 놓고 간 네모난 그릇을 아버지는 내 쪽으로 쑥 밀었다.

"아버지는요?"

"약국 아저씨랑 먹었다."

약국 아저씨는 아버지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만나는 분이었다. 나이가 한참 층지는 두 분이 어떻게 친해졌는지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아버지는 바쁜 아저씨를 대신해 간간이 약국을 지켜주며 무료한 시간을 때웠다. 그런 날이면 아저씨는 한 끼 식사대접으로 마음의 빚을 덜곤 했다.

거무스름한 메밀국수를 그날 처음 보았다. 낯선 음식을 앞에 두고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국수를 덜어 장국에 넣어주고선 어서 먹으라고 거듭거듭 손짓을 했다. 미끈거리는 면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거친 생김새와 달리 국수는 달콤하고 시원했다. 갑자기 눈앞이 뿌예 왔다.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아저씨가 사주신 국수를 먹으며 막내 딸년이 걸렸던 거다. 얼른 시원한 국수 한 그릇 사 멕이고 싶었던 거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아버지가 더욱 그립다. 입안의 국수를 꿀꺽 삼킨다. 그리움도 꿀꺽 삼킨다.

*백석 시 '북신'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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