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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희

수필가

영화제 소식이 궁금해 컴퓨터를 켰다. 열두 살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꿨다는 고수머리 남자가 예의 부스스한 머리로 트로피 박스에 턱을 괴고 있다. 사진 아래 "봉준호가 곧 장르"라고 쓴 짧은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간단한 그 글귀가 종려 나뭇잎 트로피보다 더 묵직하고 근사해 보인다.

봉준호가 장르라 함은 봉준호스러운, 봉준호다운, 봉준호만의 영화라는 뜻 아니겠는가. 그의 장르가 뿜어내는 기운이 우레같이 등등하다. '장르'가 '답다'로 환치되어 나를 잠식한다. 형용 접미사 '답다'가 '나답다'로 의미를 확장해 의식의 회색 지대에서 온종일 왕왕거린다. '나답다'라는 건 무얼까. 확고한 자기만의 정신세계, 유형‧무형의 고유한 특성이 나다움이 아닐까 어림해 본다.

나는 나다운 색깔로 살았던 적이 있는가. 그보다 '나는 누구인가'가 먼저이겠다. 고고성을 울리며 태어날 때부터 몸에 새겨진 태생적 기질이 나인가. 희붐한 새벽부터 어스레한 저녁까지 축적된 시간의 총합이 나인가. 이 모든 것이 모아져 발현되는 게 '나'의 정체인가. 뿌리와 줄기를 따로 떼어 나무라 부르지 않듯 몸과 정신 또한 분리시킬 수 없으리. 몸이 외형이고 제한적 부피를 가졌다면 정신은 내면이며 한정할 수 없는 깊이를 가졌다. 해서 지극히 자의적으로 '나'의 저울추를 정신 쪽으로 바투 당긴다.

추를 옮겼다. 표리가 바뀐 것이다. 몸이 나약한 정신을 압도하고 세속적 형식이 내용을 덮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약자의 생존 본능이었을까. 욕구와 충족이 불일치하는 현실에 적응하려는 빈자의 전략이었을까. 가면을 썼다. 무의미한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물질로 가치를 환산하는 사회에 안착하기 위해 진짜 모습을 숨겼다. 눈에서 힘을 빼고 비굴하게 손을 모았다. 고개를 숙이고 아니꼬운 생각을 감췄다. 타인의 인정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타인의 정의로 삶의 기치를 삼았다. 그들의 욕망에 맞추고자 스스로 그림자가 되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모두 진실은 아닐 터. 몸피가 커질수록 위장술은 정교해졌고 연기력은 진화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 할수록 표정은 치밀해졌다. 어떤 이는 행복해 보인다 했고, 어떤 이는 우울해 보인다고 했다. 역할에 따라 상황에 따라 천극지화 배우처럼 얼굴을 바꾼 까닭이다. 체념에서 오는 편안함 때문일까. 가끔 맡은 배역을 충실히 해냈을 땐 숙였던 고개를 쳐들기도 했다. 점점 가면이 무거워졌다. 겹겹의 얼굴은 무대 뒤 피에로처럼 허무하고도 초라해 보였으리라. 그러나 타인의 입이 무서워 거짓과 가짜로 뒤얽힌 얼굴을 차마 드러내지 못했다.

길들여진 본성이 뒤늦게 각성이라도 한 것인가. 자분치가 하얘질 즈음이었다. 추한 진실이 화려한 거짓보다 낫다는 자각이 서릿발처럼 명징하게 나의 자존감을 일깨웠다. 나인 듯 아닌 듯 알쏭한 얼굴이 견딜 수 없었다. 묶였던 몸을 풀고 종속되었던 정신을 털어내는 일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는 시작점이었다. 가면을 벗자 어두운 세월에 항거라도 한 듯 팽팽했던 볼은 굴곡졌고 청청했던 눈동자는 흔들렸다. 혼돈의 세월이 만든 음영 때문이리라.

접혀있던 자아가 후드득 날개를 펼쳤다. 비계도 없고 가림 막도 없는 거친 세상을 향해 조심스레 날아올랐다. 우연인지 예정된 수순인지 허공에 떠다니는 생각을 붙잡았다. 생각은 한 줄 글이 되었다. 영육에 깊게 밴 고약한 습벽은 심 봉사 눈뜨듯 단박에 바뀌어 지지 않았다. 깜냥대로 쓴 글이 겉멋이든 채로 한껏 부풀려져 있는 게 아닌가.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여태 쓴 글은 가면 쓴 얼굴같이 참 나가 아니었다.

끝내 열고 싶지 않았던 문을 열었다. 은폐된 생의 자취가 빛을 가린 덧문 뒤에 널브러져 있었다. 화석화된 사랑과 풍화된 슬픔, 고단한 일상과 얄팍한 실존을 바라본다. 가감 없이 나를 꺼내 보이는 일이 피붙이에게는 또 다른 생채기가 될지 모르기에 적이 용기가 필요했다. 삶은 외면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투명한 현실 인식만이 삶을 윤기 있게 하리라.

감독이 배우에게 자신을 투영하듯, 무용가가 춤사위에 제 혼을 불어넣듯 나는 한 자 한 자 나를 풀어낸다. 하나 서두르지 않을 테다. 왼 발에 오른발을 더해 나다운, 나만의 길을 부단히 걸어갈 테다. 진솔한 글이 나를 나답게 만들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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