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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희

수필가

쿨럭,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버스 한 대가 정류장으로 들어선다. 낡은 버스는 퍼런 칠이 벗겨진 자리에 더께처럼 벌겋게 녹이 슬어있었다. 여기저기 찌그러진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려온 세월에 지쳐 대꾼해 보인다. 앞문과 뒷문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내린다. 내리는 사람들은 천천히 발을 옮기거나 손잡이를 의지해 조심스레 움직이는 노인들뿐이다.

노인들은 거개가 낡은 보퉁이를 이고 지고 있었다. 세월의 궤적으로 까뭇해진 저 보따리 속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묵은 세월에 곰삭은 구수한 이야기가 들어있을까. 충실한 삶에서 얻은 땀의 지혜가 토실하게 담겨 있을까. 빛바랜 보퉁이는 노인들의 고단한 삶이 정직한 땀으로 환산되어 묵직하게 보였다.

구릿빛 주름 아래로 노인들의 지나온 삶이 보인다. 푸르른 청춘부터 저승꽃이 핀 지금까지 동이 트면 하루를 시작하고 해가 지면 하루를 마친 우직한 삶이었다. 튼실한 두 발로 논틀밭틀길을 걸으며 무위자연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온 인생이었다. 눈가의 굵은 고랑은 자연이 저들의 노고를 치사하여 내린 훈장이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버스와 기신거리는 노인이 하나의 풍경 속에 있다. 낡음과 늙음은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기력이 쇠한다는 점에서 비금비금한 삶이다. 한창때는 형형한 눈빛과 팽팽한 몸으로 세월에 겁 없이 맞섰으리라. 이젠 삭은 바퀴처럼 몸에서 시나브로 기운이 빠져나간다. 탱탱했던 날은 아슴아슴한 기억으로 남았을 뿐, 어느새 세월의 뒷모습이 익숙한 나이가 되었다.

누구도 세월을 이기거나 비껴갈 수 없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게 자연의 이치이고 순리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빠르고 더 새로운 것을 좇아간다. 낡고 늙었다는 것은 이제 '쓸모없다'와 이음동의어가 된 세상이다. 산뜻한 빛깔로 거친 세상을 달렸던 버스도 낡았다는 이유로 먼 나라에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댕댕한 기세로 세상을 호령했던 노인도 삶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기실 늙는다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만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주름살이 느는 만큼 세상의 이치도 쌓인다는 것이다. 주름살에 새겨진 세월은 지혜로 환치되어 과거와 현재를 담아 미래로 이어진다. 늙는다는 건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숙명을 지녔기에 숭고하다고 말하면 너무 과한 걸까.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어제 없는 오늘도 없다. 밑절미 같은 노인들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시김새'라는 우리말이 있다. '곰삭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시김새는 음과 음을 이어준다는 뜻이다. 앞 음과 뒤 음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시김새처럼 노인들의 곰삭은 지혜야말로 세대와 세대를 조화롭게 이어주는 시김새가 아닐까.

이순이 가까운 나도 힘든 일이 생기면 친정어머니부터 찾곤 한다.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면 어려움을 감당할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세상 지식으로는 풀리지 않던 길도 어머니 앞에는 길이 있다. 아니, 어머니는 얽히고설킨 고를 풀어 길을 만드신다. 소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구순의 어머니는 주름 밑에 온몸으로 체득한 삶의 지혜를 쌓아 놓고 자식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답을 내어주신다. 시김새 같은 어머니의 암묵지는 나를 통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질 것이다.

차에서 내린 노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노인들의 몸짓에서 삶의 일상성을 본다. 저들의 삶은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이 그저 여일하다. 저들에게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이다. 고담준론의 학문도, 도저한 진리도 평범한 노인들의 삶을 뛰어넘지 못한다. 몸으로 익힌 지혜가 생의 지문으로 남아 긴 세월을 이어 왔기 때문이다.

버스 한 대가 가릉거리며 정류장에 도착한다. 한 무리 노인들을 내려놓은 버스는 끙, 소리를 내며 머문 자리에서 일어선다. 늙은 버스 뒤를 내 삶의 증인인 어머니가 발밤발밤 걸어간다. 언젠가 어머니가 가는 길을 나도 따라갈 날이 오리라. 그 날이 오면 기꺼운 마음으로 시김새인 어머니 뒤를 따라가리라.

내가 탈 버스가 서서히 정류장으로 들어온다. 이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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