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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영동장의 어제와 오늘

6·25때 형성된 '피난민 시장' 모습 바뀌어
상설-5일장 상인 공생관계서 경쟁상대로
제2영동교 인근 쇠전에 고층 아파트 들어서
1970년대 조성한 감나무 가로수 '명물'

  • 웹출고시간2013.06.30 19:19:2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983년 어느 날

"탁배기 한 잔 하슈."

예나 지금이나 장꾼들의 목을 축이는데 탁주만한 것이 없다.

ⓒ / 임병무
충북의 최남단에 위치한 영동은 3도(三道)의 접경지대다. 충남 금산군, 경북 금릉군(1995년 김천시로 통합), 전북 무주군이 접경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경부선과 고속도로의 중간 지점이 영동에 위치하니 지역적으로 보면 한반도의 심장부가 되는 셈이다.

영동은 옥천과 마찬가지로 대전에 생활권을 두고 있다. 생필품의 대부분이 대전에서 반입되고 다시 용산, 황간, 학산, 양산 등의 면(面) 지역으로 팔려나간다.

대도시의 생필품과 교역되는 물목은 영동의 특산물인 감, 호두, 밤, 사과, 표고버섯 등이다. 그 중에서도 곶감과 표고는 영동 특산물의 대명사 역할을 한다.

1983년 영동장의 모습.

곶감 산지인 영동군 답게 영동장에도 곶감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 / 임병무
청산과 더불어 영동은 감곶이다. 집집마다 산골마다 감나무 없는 집이 없고, 가로수마저 감나무 일색이다. 군청에 이르는 3㎞ 간선도로에 10여m 간격으로 감나무가 촘촘히 박혀 있다.

지난 1970년부터 플라타너스 나무 대신 감나무를 가로수로 심기 시작하더니 10여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가을이 되면 탐스러운 열매를 어김없이 맺고 있다. 중심가에서 한발치만 벗어나면 가가호호 옥상 위에 감을 말리기 위한 감타래(시렁)가 동그마니 올라서 있다.

수확기가 되면 감은 껍질은 벗는다. 아낙들의 손에 의해 표피가 벗겨진다. 콘세트 시렁 위에 옮겨져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다. 뽀얗게 피어오르는 분가루 단장을 하고 나면 전국 각처로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시세가 좋을 때는 접 당 5~6천원을 웃돌았는데 요즘은 3~4천원을 맴돌고 있다. 1982년 한 해에 영동군은 65만접을 생산해 12억원을 올렸다.

감과 더불어 표고버섯은 영동시장 경기를 부채질해 준다. 참나무에서 생산되는 표고는 영양가가 높을 뿐만 아니라 요즘 들어 항암식품으로 각광을 받게 돼 인기를 더해 간다.

호두는 전국적으로 충남 천안시와 생산량의 으뜸을 다투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호두과자 등 제과의 원료로 많이 사용돼 그 수요량이 생과로만 쓰일 때보다 현저하게 늘어났다.

호두알은 깨지지 않으면 좋은 노리개가 된다. 호두 껍데기에 참기름을 잔뜩 먹여 놓아 손바닥에 넣고 비비면 '오도독' 소리를 낸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해본 장난이다.

영동의 시장 바닥은 중앙동, 영산동, 계산동 일대에 형성돼 있고, 그 중심부에 상설 시장이 들어서 있다. 영산동 입구에는 채소 시장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는데 소채류는 심천면 채소단지에서 공급된다.

한 아낙이 구멍난 고무장화를 수선 중이다. "말 잘 들어야 해". 엄마가 사준 알사탕을 손에 꼭 쥔 아이의 모습이 정겹다.

ⓒ / 임병무
시장 바닥에는 일명 '피난민 시장'이라는 곳이 있다(표준어는 피란민이나 영동읍민들은 피난민 시장이라 부른다).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옷가지나 떡을 팔던 곳인데 20여년 전에 없어졌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 아래 잡화상, 어물전이 들어서 있으나 이름만은 피난민 시장으로 남아 있다.

유천여관 입구에서 피난민 시장으로 통하는 골목에는 나무 시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알치나무 삭정이나 청솔가지를 지고 나와 한나절을 보내던 곳이다.

나무꾼은 대부분 남정네였지만 혹간 아낙도 섞여 있었다. 장작바리나 삭정이는 남정네가 지고, 청솔가지나 마른 솔잎을 모은 갈비는 아낙의 손에 의해 나무전으로 옮겨졌다.

땔감이 나무에서 석탄, 기름, 프로판가스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나무꾼의 모습은 어느덧 시장 바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나무 팔아 탁배기에 인절미 사먹고, 지게 목발에 얼간고등어 매달아 집을 찾던 나무꾼의 이야기는 전설로만 남게 됐다.

/ 임병무 전 충북일보 논설위원

◇2013년 6월의 어느 날

영동장은 상설시장과 5일장이 공존 혹은 경쟁하는 구조를 띠고 있다.

ⓒ / 임장규기자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영동의 명물, 감나무 가로수가 푸름을 더해간다. 길 잃은 땡칠이는 때 이른 폭염을 견디지 못하고 다리 밑으로 기어들어 혓바닥을 길게 늘어트린다. 한낮 33도의 불볕더위를 무색하게 만드는 건 영동 5일장(매월 4일, 9일) 장꾼들의 불티나는 흥정소리 뿐이다.

영동IC를 지나 영동읍내에 들어서면 커다란 아치형 영동교가 등장하는데,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편에 길게 늘어선 노점이 5일장이다. 바로 옆 3개의 골목에 들어선 영동전통시장(상설시장)과 공존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영동전통시장의 모습은 알파벳 'E'자 모양과 흡사하다.

영동교와 가장 가까운 첫 골목이 1980년대 초반까지 있던 상설시장, 두 번째 작은 골목이 피난민 시장(주로 채소류를 판매), 세 번째 골목이 현재 가장 번성한 영동시장이다. 이 3곳은 모두 고정적인 점포가 들어선 상설시장이며, 5일마다 점포 입구와 대로변 사이에 노점 장(場)이 들어선다.

과거 떡, 만두 등을 팔던 '영동 피난민 시장'. 지금은 현대식 아케이드 지붕으로 모습을 새단장했다. 주로 채소류를 파는데 날씨가 더운 탓인지 행인들의 발길이 뜸하다.

ⓒ / 임장규기자
한국전쟁 이후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영동장은 상설시장과 5일장의 공존 체제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둘의 사이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5일장 장돌림들이 90% 이상 외지인으로 바뀌면서 현지 상설시장 상인들의 눈초리를 받게 된 거다.

바구니, 혹은 리어카에 각종 채소를 바리바리 싸들고 오던 촌로들은 조립형 매대를 갖춘 최신 트럭 앞에 설 자리를 내준지 오래다. 영동전통시장 상인회에 따르면 상설시장의 점포는 110곳, 5일장에 들어서는 노점은 60곳 정도다.

한 현지 상인은 "예전엔 5일장과 공존하는 관계를 취했지만 IMF 이후 대전, 김천, 무주, 옥천 등지에서 생계형 장돌림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이제는 경쟁 상대가 돼 버렸다"며 "솔직히 이들이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했다.

30여년의 세월은 시장 구조의 변화와 함께 특산품의 변모도 가져왔다. 표고버섯 거래량이 줄은 대신 포도 거래량이 크게 늘었다. 아직은 포도 출하기가 아니라 수박, 자두 같은 여름 과일이 매대를 장식하고 있다. 하우스 포도는 7월 중순, 자연재배 포도는 8월 중순 이후는 돼야 그 달콤한 맛을 허락한다니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대신 시장 대로변에 길게 늘어선 감나무 사열(査閱)이 눈이라도 즐겁게 해준다.

영동장 대로변에 길게 늘어선 감나무 가로수. 지금은 영동군 전역에 퍼져 있는 명물 중의 명물이다.

ⓒ / 임장규기자
1970년대부터 영동의 명물로 자리 잡은 감나무 가로수는 그 세력을 더욱 키우고 있다. 영동시장 인근 3㎞에서 지금은 영동 11개 모든 읍·면 수십㎞ 도로변으로 씨앗을 퍼트렸다. 매년 10월 초면 영동지역 최대 축제인 난계예술제가 열리는데 그 때까진 관광객들을 위해 감 열매를 보존한다고 한다.

11월 초 영동군에서 정하는 수확일에는 누구나 공짜로 감을 딸 수 있다. 눈 호강하고 따는 재미있고 거기다가 배까지 부르니, 이거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털 뽑아 부채질하는 일석삼조가 아니겠는가.

제2영동교에서 바라본 모습. 저 멀리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15년 전까지 쇠전이 있던 곳이다.

ⓒ / 임장규기자
영동시장 첫 번째 골목과 세 번째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그 끝이 만나는 지점에 제2영동교가 길게 늘어져 있다. 제1영동교가 들어서기 전까지 영동천을 잇는 가장 큰 다리였다. 15년 전만해도 제2영동교 인근에 쇠전이 있었으나 축협이 옥천과 통합되면서 거래량이 더 많은 옥천 쇠전에 흡수당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은 아직도 유유히 흐르는데 얼룩백이 황소의 금빛 게으른 울음은 정지용의 고향, 옥천으로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다.

/ 임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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