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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옥천장의 어제와 오늘

옥천의 명물 '거리목 장사'는 추억만 남아
구읍→삼양리→금구천, 유동인구 따라 이동
공설시장과 5일장 공존… 때론 경쟁관계
아직도 150여 장꾼 활동… 우시장은 시들

  • 웹출고시간2013.06.23 19:20:4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983년 어느 날

1980년대 초 옥천 우시장은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흥망했으나 지금은 그 세가 많이 줄었다.

ⓒ 임병무
경부(京釜) 국도상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은 옥천(沃川). 이 곳에 과객의 왕래가 빈번했던 것은 오늘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영남 지방에서 추풍령을 넘어 한양 길을 재촉하는 과객이나 보부상, 소몰이꾼들은 이원면 개금벌과 옥천 삼거리를 지나기 마련이었다.

삼거리의 찹쌀 인절미는 오랜 여행길에 쌓인 노독(路毒)을 풀어주는 별미로 개금벌의 청포묵과 함께 고소한 그 맛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나그네의 정취가 서렸던 삼거리(현재 옥천읍 삼양리)에는 금산, 대전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길목을 지키고 있을 뿐 떡장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치닫는 차량의 행렬과 철마의 경적이 요란을 떨고 있는 게 변모된 삼거리의 모습이다.

현재 옥천시장은 삼양리에 개설되고 있는데, 그 이전에는 구읍(舊邑)에 섰었다. 이 일대를 구읍이라 부르는 것은 경부선이 개통되기 전 옥천읍의 소재지였기 때문이다.

벌판뿐이던 삼양리 일대는 철도가 개설되면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37년에는 시장을 이곳으로 옮겨오게 됐다. 3만명의 옥천읍민 가운데 2만5천명이 신(新) 시장인 삼양리 일대에 거주하고 있으니 명실공이 옥천의 노른자위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시내버스 주차장에서 실개천을 건너면 상가 뒤편으로 옥천의 장터거리가 펼쳐진다. 때가 구정 세밑인데도 피복전 어름은 한산하기 이를 때 없다. 정월 대보름에 부럼 깨는 생강엿·조청엿 파는 엿장수의 엿단쇠 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지고, 정력에 좋다는 건강식품 노점상의 메가폰이 고요를 깨뜨릴 뿐 장날이 와도 시장 경기는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이런 가운데 새로 등장한 장사꾼이 속칭 '거리목 장수'라는 상인들이다. 이들은 시내버스 정류장인 삼양리 일대에 지켜 섰다가 시골 주민의 곡식바리를 꼬드겨 헐값에 몰이해 간다.

안내, 안남, 청성, 청산 주민들이 고추, 마늘, 참깨 등을 가지고 옥천 장터에 이르면 내리기가 무섭게 값을 흥정하는데 그 동작이 솔개가 햇병아리 채어가듯 기민하다.

시내버스가 성모병원 근처에 이르면 거리목 장수들은 버스와 같이 뜀박질을 한다. 부지런한 참새가 벌레를 많이 잡는다고 한 발짝 느리면 허탕 치기 십상이니 사타구니에서 왕방울 소리가 나도록 뛸 수밖에 없었다.

옥천의 우시장하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현지 사람들의 말로는 수원, 오산장 다음으로 크다고 하나 객관적으로 보면 전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끼어든다. 삼양리 시장 통에서 대전 쪽으로 한 발치 떨어진 쇠전거리에는 계류목마다 살찐 소가 양을 새긴다. 출하된 마리수가 줄잡아 300~400여 마리 가량 되는데 실제 거래량은 200여 마리 정도라고 한다.

살찐 소의 엉덩짝을 멍석 같은 손바닥으로 냅다 후려치며 값을 부르는 거간의 목쉰 소리. 옹골지게 값을 깎는 매자(買者)의 악다구니. 쇠전 어름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트럭의 소음등이 한데 어우러져 쇠전은 항상 시끌벅적하다.

옥천의 특산물로는 갈포, 포도, 소채류, 과수 등을 들 수 있다.

칡을 원료로 해 만들어지는 갈포는 고급 벽지로 인기가 대단하다. 유럽, 아프리카, 미국 등 세계 각국으로 전량 수출되는데 이로 인한 연간 소득은 1억6천800만원에 달한다. 1982년 포도는 345ha에서 2천800t을 생산, 19억2천600만원을 벌여 들였다.

이들은 대개 협동조합을 결성해 계통 출하하기 때문에 중간 상인의 농간을 막고 제값을 받아낸다. 그 중에서도 세산리 포도는 옥천의 명물로 손꼽힌다.

알알이 영근 까만 포도의 감칠맛이란 먹어보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향기도 좋거니와 씨가 적어 미식가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옥천의 토산품이다.

/ 임병무 전 충북일보 논설위원

◇2013년 6월의 어느 날

옥천공설시장 옆에 길게 들어선 옥천5일장의 모습. 매대에 각종 생필품이 널브러져 있다.

ⓒ 임장규기자
매월 5일, 10일 들어서는 옥천장은 그 유래가 명확치 않다. 구전(口傳)으로만 이어질 뿐 명확한 기록이 없다. 순조 27년(1827년) 발행된 임원경제지 - 예규지 편에 옥천장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당시 옥천현의 읍내장은 2일, 7일장으로 표기돼 있다.

구읍(舊邑)에 섰던 옥천장은 1937년에 신읍(新邑)인 삼양리로 옮겨 갔다. 이후 다시 금구리 옥천역 앞으로 이동했는데, 이 때가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사람 이동이 가장 많은 금구리 금구천 일대에 들어선다.

이는 역사서에 기록된 사항이 아니다. 단지 현지 상인들의 말과 1983년 임병무 전 충북일보 논설위원이 펴낸 '장날'의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한 거다. 옥천공설시장 상인회가 그동안 각종 자료를 수집하려 했으나 옥천군지를 비롯한 그 어떤 역사서에도 옥천5일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옥천공설시장 상인회 김재수 총무는 "그 지역의 전통시장을 보존·육성하려면 역사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군청에서 제대로 기록해 놓지 않은 게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이라도 옥천시장의 과거와 오늘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옥천역에서 500여m 거리에, 옥천IC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에 위치한 옥천장. 금구천을 중심으로 난전이 펼쳐지는데, 그 규모가 도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다.

옥천5일장이 이렇게 잘 보존돼 있는 건 옥천공설시장 덕분이다. 상설시장으로서 지난 2008년 현대식 건물로 치장한 옥천공설시장은 현지 터줏대감 상인들로 구성된 '옥천군 공인 시장'이다.

반면 옥천5일장은 외지 상인들이 주를 이룬다. 머릿수가 줄잡아 150~180명 정도 된다. 들리는 말에는 5일장 상인들의 하루 총 매출이 1천만원을 넘나든다고 하니 옥천공설시장 상인들의 시샘을 받고도 남을 만하다.

1960년대부터 옥천장을 주름잡던 봇짐·등짐장수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 잘 짜인 바둑판 모양을 한 노점 매대가 장사진을 치고 있다.

마늘, 약재, 고추 같은 현재 특산물을 물 건너 온 동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본다. 파리 몇 마리가 뙤약볕을 피해 파라솔 안으로 들어오는데 모기향의 아지랑이가 이를 쫓느라 몸을 배배 꼰다. 그 향에 취했는지 잡종견 한 마리가 생선 밑에서 꾸벅꾸벅 존다.

먼 옛날 옥천장이 열릴 때면 인근 옥천극장에서 만나 사랑의 밀어(密語)를 나누던 더벅머리 총각과 어수룩한 시골 처녀는 백발의 촌로가 돼 버렸다. 극장 건물도 세월의 강을 건너 농협 건물로 새 옷을 갈아입었다. 당시 옥천장을 찾는 사람들은 극장을 '읍(邑) 공관'이라 불렀다고 한다.

옥천장에 나온 70대 마늘 행상. "마늘 좀 들여가라"고 행인들에게 소리쳐보지만 매기가 신통찮다.

ⓒ 임장규기자
"마늘 좀 들여가. 1접(100개)에 1만원." 금구천 다리에 길게 늘어선 마늘 행상들의 매기(買氣)가 신통치 않다. 이곳 마늘 장수들은 옥천과 영동을 도는 장돌림들인데, 대부분 한 트럭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소(小) 도매상들이다. 요즘 주부들은 마트의 깐 마늘을 선호해 다듬지 않은 육쪽 마늘은 그닥 인기가 없다는 게 마늘 행상들의 푸념이다.

과거 옥천의 특산물이었던 갈포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공장에서 찍어낸 값싸고 질 좋은 도배지가 TV 광고에 등장하면서부터다. 과거 전국에서 손꼽히던 쇠전은 옥천공설시장 옆 주택가로 변했다. 한때 시외버스터미널로 이전했던 쇠전은 하천 범람 피해를 이기지 못하고 삼양리에서 문정리로 이전한 성모병원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지금도 거래가 활발하긴 하나 30년 전보단 많이 쇠퇴했다.

5일장은 말 그래도 5일마다 한 번씩 열린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닷새 마다 장이 서는 걸 한 파수(派收)라 하는데, 장돌림들은 이 때 모든 걸 쏟아 부어야 한다. 똥줄(?) 타는 장사꾼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을 마친 촌로들은 금구천 다리 밑에서 윷을 던지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 임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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