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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충북 시장의 어제와 오늘

場, 그곳엔 삶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 웹출고시간2013.06.02 19:51:0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 들어가며

1980년대 초반 한 행상이 각종 잡기류를 펼쳐놓고 새 주인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임병무
'스마트(smart) 문명'의 이기(利器)는 우리네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화폐의 발달로 활성화된 시장(市場)은 진퇴를 거듭하다 급기야 '스마트 시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됐다. 이른바 '사이버(cyber) 시장'이 탄생한 거다.

전화 하나로 음식을 주문하는 건 물론이고, 몇 번의 휴대폰 버튼만으로 태평양, 대서양 건너편의 물건을 살 수 있게 됐다.

메밀꽃 향기 사이로 로맨스 가득 풍기던 허생원의 장사 수완은 삼성, 애플로 대변되는 최첨단 도구에 밀려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 터를 잃은 전통 시장은 역사의 외곽지대를 맴돌다 지쳐 가냘프게 숨만 내몰아 쉬는 지경에 이르렀다. 철지난 바닷가를 연상하리만큼 쓸쓸한 표정을 짓고, 세월의 뒤안길로 표류를 거듭하다 작은 귀퉁이에 머무르며 선조의 숨결을 전하는 정도다.

우시장처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장이 서는 곳마다 미니 가축시장(?)이 서기 마련이었다. 강아지, 토끼 등 집에서 기르는 작은 짐승을 물목으로 내놓은 시골장터의 옛 모습이다.

ⓒ 임병무
그러나 장(場)은 쇠퇴를 거듭할망정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60~70년대 고속 근대화 정책으로 정부가 5일장의 폐쇄를 유도하기도 했으나 장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장에 서린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리라. 제 아무리 스티브 잡스가 살아 돌아온들 허생원의 나귀 방울소리를 송두리째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1980년대 초반 충북 장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 충북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임병무 문화전문기자가 취재·보도한 '장날(1983년, 청조사)'이란 책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 도내엔 40여개의 장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중 각 시·군을 대표하는 장을 12회에 걸쳐 살펴보기로 한다. 그 역할은 임병무 기자의 아들인 임장규 기자가 맡는다. 굳이 부제를 붙인다면 '아들아, 장 보러 가자' 정도가 좋을 듯하다. 도내에서 가장 번성했던 청주쇠전, 약전골목, 목물전, 저자거리 등 청주지역 5일장이 모두 사라진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인정과 애환이 숨 쉬는 삶의 현장

지금은 사라진 충주 목계장의 1980년대 초반 모습. 장꾼들이 난전의 신기료 장수 앞에서 신발을 수선하고 있다.

ⓒ 임병무
장은 한 폭의 풍속도(風俗圖)다. 장은 치열한 삶의 현장인 동시에 풋풋한 인심이 피어나는 인정의 가교(架橋)다. 그곳에는 서민의 애환이 서려 있고, 선조의 체취가 숨어 있다.

고도 산업화의 도시화 추세에 밀려 시간과 공간의 뒤켠으로 한 발짝 물러나 앉아 있지만, 장은 아직도 농촌경제의 핵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비록 전성기는 지났다고 하나 아직도 도내에는 40여 곳의 5일장이 닷새만큼 어김없이 열린다. 30년 전보다 20여개는 줄었으나 오히려 10여개는 새로 생겨났다. 사람 사는 곳에 장(場)이 들어섰고, 장이 들어선 곳에 정(情)이 뭉게뭉게 피어왔다.

대형마트가 도시 시장을 덜컥 집어삼켰다고 하나 농촌 깊숙한 곳의 생활 습관까지는 바꿔놓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가 누군지 알 턱없는 촌로(村老)들은 지금도 장을 잔칫날처럼 기다리곤 한다.

그들은 장과 인생을 함께 했다. 꼭두새벽 밥을 지어먹고 먼동이 틀 무렵 길을 나서면 해거름녘에나 집에 돌아왔다. 집안 어른들이 장에 갈 때면 철부지 아이들은 옥색 고무신 사다주겠다는 약속을 거듭 확인하고서 온종일 집을 지키다 스르르 잠에 떨어지곤 했다.

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민의 애환. 거기에는 삶의 맥박이 뛰고 끈끈한 휴머니티의 액체가 넘쳐흐른다. 잊혀져가는 장날의 풍물, 여기에 얽히고설킨 얘기들을 원고지에 담아본다.

장의 역사

지금은 가구점 거리로 탈바꿈된 청주 남주동 약전골목의 1983년 겨울 어느날.

ⓒ 임병무
현장 취재에 앞서 우리나라 시장의 기원과 변천 과정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청주대 김신웅 전 교수는 그의 논문 '한국시장에 관한 연구'에서 시장의 변모하는 과정을 훑어보고 있다. 그는 한국 시장의 발생 시기를 주화와 곡폐가 병용된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소급 추정하고 있다.

삼한 시대에는 촌락 간에 형성되는 가로시(街路市), 국가 간의 경계시(境界市), 정치의 중심지에 있던 성읍시(城邑市), 자연신을 숭배하는 풍습에 따라 나타났던 제전시(祭典市) 등이 존재했다.

신라 시대에는 소지왕 12년(490년)에 처음으로 수도인 경주에 경사시(京師市)를 개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감독하는 시장 감독청을 삼시전(三市典), 감독관을 시전(市典)이라 불렀다.

이 때부터 수도에 설치되는 경시(京市)와 지방에 개설되는 향시(鄕市)가 있었는데, 충북의 시장은 모두 향시에 속한다.

1983년 여름, 난전 앞에서 시원한 콩국수가 팔리고 있다. 한 그릇에 200원이라는 당시 가격이 새삼 새롭다.

ⓒ 임병무
고려 시대의 상업조직은 신라의 경시를 그대로 모방했다. 수도에는 경시에 해당하는 관설시장인 방시(坊市)와 일반 교환시장인 가로시를, 각 주현에는 향시(鄕市)를 두었다. 성읍시장은 500곳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읍시는 대개 30리나 50리마다 설치됐다. 당시엔 발걸음으로 하루길이 백리(百里)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지금도 이어져 50리 안에서 같은 장이 열리는 법이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9년 한성에 관설시전(官設市廛)이 설립됐다. 혜정교(惠政橋)에서 창덕궁 동구에 이르기까지 좌우행랑 100여 개의 점포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했다. 이후 국고의 잉여물을 처분하는 역할을 맡은 육시전으로 발전해 관영상업의 위풍을 떨쳤다.

경향(京鄕) 각지에도 향시가 정기적으로 개설돼 크게 발전했고, 한성 각 시전에는 도중(都中)이라는 상인조합까지 생겨났다.

/ 임병무 전 충북일보 논설위원·임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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