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문맹률은 1% 미만으로 제로에 가깝다. 그만큼 교육에 대한 열정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우고 익히기 쉬운 한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 된 산업화 시대에 새로운 문맹이 생겨나고 있다. 바로 디지털 문맹이다. 문맹으로 산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나는 요즘 세상에 나가는 것이 두렵다. 나는 기계 앞에서 청맹과니다. 먼 길을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청주를 벗어날 때는 주로 남편과 함께하는 데 이번에는 남편이 사업상 중요한 다른 일정이 있다고 한다. 먹고사는 것이 중한 일이니, 사업상이라는 말 때문에 혼자 길을 나서기로 했다.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다. 멀기도 하고 언제 또다시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곳이라, 예전에 신세를 졌던 분들도 보고 오기로 한다. 그들에게 과일이라도 사 갈 요량으로 마트에 들른다. 황금 사과를 사서 계산대로 가는데, 계산대가 모두 무인으로 바뀌어 있다. 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린다. 어찌해야 하나 어떻게 계산을 무사히 마치고 저 공간을 통과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다들 척척 터치스크린을 이용해 계산을 잘도 한다. 막막함에 매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마지막 칸에 있는 계산원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으로 물건을 들고 달려가 계산하고 무사히 마트를 빠져나온다. 4차 산업 시대 빠르게 보급된 키오스크는 페르시아어로 '별장 속 작은 개방형 건축물을 의미하는 쿠슈크(Kushk)'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요즘의 키오스크는 전자가판대를 의미한다. 카페, 식당, 영화관, 공항, 박물관 등 키오스크가 없는 곳이 드물다. 사람보다 빠른 정보처리 능력을 통해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나처럼 디지털 문맹들에는 너무 불편한 시스템이다. 과일을 사서 고속도로를 향하는데 기름이 달랑거린다. 걱정이 밀려든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에 기름을 넣고 가야 한다. 그런데 주유소 두 군데를 지났으나 모두 무인 시스템이다. 이제 IC까지 주유소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곳은 셀프가 아니길 바라면 속도를 낸다. 그러나 역시 그곳도 무인 시스템이다. 어쩔 수 없이 기름을 넣지 않고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고속도로 휴게소라면 당연히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기름이 거의 바닥을 보이니 이번에는 무인이건 아니건 선택의 여지 없이 기름을 넣어야 한다. 드디어 도착한 고속도로 안 휴게소, 아뿔싸! 이곳도 무인 서비스지역이다.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키오스크 앞으로 다가간다. 손 모양에 정전기 방지 터치를 하고 시스템이 안내하는 대로 유종을 선택한다. 그리고 금액을 입력하고 안내에 따라 주유구를 열고 호수를 꼽으려 하는 순간 기름이 바닥으로 주르르 흐른다. 당황한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직원을 불러온다. 호수를 먼저 꼽고 레버를 당겨야 하는데, 호수를 기계에서 들면서 동시에 레버를 당겨서 그렇다고 한다. 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기름을 넣었지만, 옷엔 기름이 묻고 손엔 진땀이 난다. 다시 출발하고 그제야 눈에 가을이 들어온다.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꽃보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산들이 휙휙 지나간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일을 마치고 다시 청주로 향한다. 가는 도중 뭐든 다 있다는 상점에 들러 가족들 줄 선물을 골라 계산대로 향한다. 그런데 또 한숨이 나온다. 그곳도 터치스크린과 바코드 리더기를 이용한 셀프 계산을 해야 한다. 가게 이름이 다 있어를 연상하게 하는데, 없는 게 있다. 뭐든 다 있는데 계산원은 어디에도 없는 상점이다. 당황한 나는 뚤레뚤레 매장을 둘러본다. 멀리 한 여직원이 있다. 그녀를 불러 겨우 계산을 마치고 고속도로를 탄다. 전주를 지나고 회덕을 지나는데 배가 고프다. 휴게소에 들러 식사할까 말까 고민한다. 그곳도 키오스크로 주문을 할 것이다. 이내 휴게소를 포기한다. 집에서 싸 온 귤과 커피로 허기를 달래며 돌아온다. 짐을 풀고 소파에 누워 한참을 생각한다. 나는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전자책보다 종이책이 더 좋고 AI 스피커보다 사람의 육성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급속도로 변화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디지털 문명에 적응해야 한다. 21세기에 걸맞은 스마트한 인간이 되어 키오스크 앞에서도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가을이 깊어가고 내 고민도 깊어간다.
삶의 길을 걸을 때 이정표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며 내 족적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살핀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 그들이 왔다. 빗발이 장대처럼 내리꽂히는 도로라 했다. 새벽에 일어나 약재를 달인 물에 찹쌀을 넣고 오리를 넣어 한 시간 반을 삶아왔다고 했다. 감동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다섯 시간을 달려왔지만 즐거운 길이라 했다. 장거리 운전이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환한 웃음을 내게 보내주었다. 그네들이 보러온다고 했을 때 설마설마했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한 달간 청주를 떠나 있는 내게 그들이 청주의 훈훈한 공기를 안고 왔다. 혼자 칩거해 있을 내 황폐한 영혼을 위문하러 온 것이다. 처음에 온다고 할 때 사양했었다. 그네들의 마음은 너무나 감사했지만, 왕복 열 시간이 족히 걸리는 길이기에 차마 오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땅끝 마을보다 더 먼 섬으로 나를 보러 왔다. 점심을 먹고 소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5대째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치 가족의 내력이 빼곡한 곳을 돌며 위대한 예술혼을 생각한다.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이 한 사람의 일생에서도 힘든 일인데 어떻게 대를 이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선조들의 올곧은 걸음이 이정표가 되어 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섬의 요소요소를 돌고 내 작업실로 왔다. 두 평 됨직한 작은 방에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전부다. 혼자 있을 땐 좁은 줄 몰랐는데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 들어가니 앉을 곳이 없었다. 둘은 침대에 앉고 셋은 방바닥에 앉았다. 나는 신문지를 방바닥에 펴고 수박을 잘랐다. 작고 허름한 공간이지만 그들의 넘치는 사랑에 방안엔 웃음꽃이 피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지만 우리는 글을 쓴다는 공통분모로 십여 년을 함께했다. 각자의 일에 몰두하다가 축하할 일이 생기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은행리 아지트에 모여서 기쁨을 함께 나누곤 했다. 모두가 성실히 자신을 길을 걷는 이들로 내게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다. 시인이면서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예술 감독과 공무원을 지냈던 심 회장님, 시인이며 사회복지학과 교수인 이 교수님, 시인이면서 영화감독 겸 화가인 윤 선생님, 시인이며 가수인 정 선생님. 모두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준다. 가지런한 그들의 삶을 보며 문득 서산대사의 시를 떠 올려 본다. 눈길을 걸을 때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길을 걸을 때 不須胡亂行 (불수호난행) 어지럽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蹟 (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遂作后人程 (수작후인정)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들을 보내고 바닷가를 거닐며 생각에 젖는다. 나도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이정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올곧게 늙어 갈 수 있을까. 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인지라 알게 모르게 실수를 많이 한다. 또 그로 인해 많은 흠결이 누덕누덕 붙어 있다. 살면서 흔들릴 때면 늘 이 시를 떠 올린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나는 문학이라는 길을 택했고 그 길을 걷고 있다. 비록 잘 나가는 작가는 아니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어지러이 날리지 않길 바란다. 훗날 다른 시인들의 이정표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 난 깨진 유리잔이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내가 무기력한 존재라니, 아니 네가 이렇게 나에게 강력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네가 없는 나는 껍데기일 뿐이란 것을 새삼 느끼며 오나전(*완전이라는 뜻. 인터넷 게시판에서 자판을 빠르게 치면서 생긴 오타에서 비롯) 멘붕에 빠져버렸다. 2학기 학부모 상담 전화를 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네 얼굴에 팝업창이 떠올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글자들이 거슬렸다. 수화기를 든 채로 아무 생각 없이 마우스 커서를 대고 클릭했다. 네 얼굴이 파래지더니 '응용프로그램 오류'라는 메세지를 토해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메모리를 리드할 수 없다고 했다. 프로그램을 마치려면 확인을 클릭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마우스를 대고 확인을 클릭했다. 순간 네 얼굴은 백지장으로 변해버렸다. 아무리 본체를 켰다 끄기를 반복해도 네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하얀 얼굴은 어떤 음도 어떤 활자도 뱉어내지 않았다. 마치 전염병에 걸려 마스크를 끼고 있는 사람처럼 입을 봉했다. 내 모든 업무 정보를 담고 묵묵부답인 너. 순간 머리칼이 쭈뼛거리며 수백 마리 사마귀가 심장을 뜯어먹는 것 같았다. 사지가 절단된 채 돼지우리에 던져진 척부인의 기분이 이랬을까. 캄캄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정보 담당자에게 연락했으나 정보업체에 연락하겠다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제발 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길.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서 치어떼처럼 바글거린다. 유아 모집 관련 '처음 학교로' 사용자 교육을 온라인으로 받아야 하고 재입학 안내장 작성 및 신입 원아 모집 요강을 만들어 발송 및 시스템에 입력해야 하고, 교원평가 관련 업무 사이트를 활용해 교원평가에 관련된 우리 유치원의 정보를 입력하고 평가 안내문을 작성해서 발송해야 하고 졸업앨범 촬영 안내 및 업체와 촬영 일자 협의, 졸업사진 촬영 희망 조서 안내장 발송 및 결과 보고를 해야 하고 또 특성화 강사 급여 및 자원봉사자 급여 기안을 작성해야 하고 이번 달 유아 학비 집행 관련 품의를 해야 한다. 퇴근 후에도 네 생각에 뒤척인다. 혹여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해야 할 일은 태산이고 너 없인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교사가 수업만 하는 시스템이 절대로 아닌데. 어쩌면 수업보다 그 외의 업무가 더 많은데. 제발 네가 돌아오길 바라며 잠을 청해본다. 꿈속에서도 너를 잃은 악몽이 덮쳐와 자다 깨기를 반복한다. 선잠 깬 아침이 주억거리며 머릴 들고, 오늘따라 빗방울이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축축하게 젖은 마음으로 빗물을 맞으며 이른 출근을 한다. 떨리는 손으로 너의 몸을 더듬어 버튼을 누른다.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있는 너. 정보 담당자에게 다시 독촉하고 정보업체에 연락했다는 대답을 들은 후 수업에 들어간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연구실에 두고 교실로 향한다. 수업하는 도중에도 마음은 연구실에 가 있다. 제발 제발. 수업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 다행히 넌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하루 만에 다시 너의 얼굴을 맞는다. 그러나 너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회복되었을 뿐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라 했다. 정보업체 직원이 임시로 숨을 쉬게 해 놓았으니 모든 자료를 백업 받아 놓으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언제 컴이 맘을 바꾸어 돌아설지 알 수 없다고 했단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외장 하드를 꺼내 너의 기억의 저장소에 담겨있는 모든 내용을 백업시킨다. 네가 이렇게 중요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는다. 하루 동안의 너의 외출에도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니 말이다. 앞으로는 너의 작은 메시지 하나 팝업창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다독이며 살아야겠다. 혹시나 모를 너의 변심을 예상해 백업해 두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너 없는 하루는 내게 천년보다 더 길다.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다. 오직 나만을 생각하며. 그동안 가족들 뒷바라지에, 직장 일에 얼마나 많은 날을 쉬지 않고 달려왔던가. 나를 위한 시간은 늘 뒤로 뒤로 미뤄놓다 보니,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올여름은 나 혼자 먹고 나 혼자 자고 나 혼자 나를 만나고 나 혼자 산책하고 나 혼자 책을 보기로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나를 뒤적여 볼 생각이다. 혼자라는 것은 얼마나 호젓할까. 나를 아는 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를 찾아가는 일, 생각만 해도 두근거렸다. 다섯 시간을 달려 도착한 그곳엔 바람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상으로는 네 시간 이십 분이 찍혔었다. 하지만 워낙 공간지각력이 떨어지고 길치인 나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예상 시간보다 무려 사십 분 늦게 당도했다. 차에서 내린 나를 처음 맞아준 것은 바닷바람이었다. 두 팔 벌려 반기는 바람의 환대에 한참을 품에 안겨 죽림리 해변에 서 있었다. 미역처럼 길게 펼쳐진 해안도로에 파도 소리가 몰려왔다. 멀리 수평선이 밑줄처럼 그어진 곳엔 갈매기들이 춤추고 있었다.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폐교 옆에 딸린 부속 건물이었다. 폐교는 시화박물관으로 탈바꿈되었고, 관사로 사용하던 곳은 작가들이 머물 공간으로 정비되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아담한 숙소였다. 무수히 많은 선생님들이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려 고심했으리라. 여자 숙소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니 주방 하나 작은 화장실 하나 그리고 방 두 개가 입구를 마주 보고 있었다. 옆 방은 평론가가 기거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방 열쇠가 없는 방이었다. 얼마 전까지 있었으나 어느 순간 사라졌다고 했다. 내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인 걸 어찌 알았을까. 나는 열쇠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수중에 책과 노트북밖에 없으니 누가 와서 가져가기는커녕 보태주고 가고 싶을 거라고 웃어주었다. 안으로는 잠글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잠잘 때만 잠글 수 있다면 괜찮을 성싶었다. 짐을 풀고 바닷가로 나가기로 했다. 신참인 내게 공주에서 오신 평론가님이 함께 걸으며 이것저것 알려주기로 했다. 케리어에 있는 짐을 대충 꺼내놓고 바다로 갔다. 갯벌이 허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미역과 청각이 떠밀려와 있고 꼬시래기가 여기저기 돌에 붙어 있었다. 마냥 신기했다. 내륙에 둘러쌓인 청주에서는 물이라고는 무심천이나 명암저수지만 보다가 먹거리가 넘실거리는 살아있는 바다를 보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미역을 줍고 청각을 줍고 꼬시래기를 주웠다. 열심히 줍는 내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첫날이라 그렇지 좀 지나 보면 줍는 것도 시들해질 것이라고. 그녀는 여고 교사를 하다 퇴직 후 몇 달째 이곳에 머무르면서 청탁받은 서평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며 열심히 바다가 토해낸 해초를 주웠다. 꼬시래기를 데쳐서 새콤달콤하게 무쳤다. 바다의 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혼자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한 달간 머무르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적었다. 그리고 간간이 가 보아야 곳을 떠올렸다. 머리털 나고 처음 온 곳이고 언제 또다시 올지 장담할 수 없는 곳이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가는 곳마다 다 눈에 담아야 한다. 팽목항, 울돌목, 소치기념관, 신비의 바닷길 등을 목록에 넣었다. 그리고 읽어야 할 책과 써야 할 글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계획한다고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획이 있어야 길을 잃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 계획 중 반 만 실천을 하고 돌아가도 올여름 진도는 내 기억의 필름에 아름다운 고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창백한 푸른 점(*칼 세이건의 책 제목) 지구에서 개미처럼 홀로 떠돌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한 마리가 알 항아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 집에는 다섯 마리 닭이 산다. 친정에서 병아리를 데리고 왔는데, 언젠가부터 맨드라미 같은 벼슬이 머리에 피기 시작하더니 이젠 제법 닭 냄새를 풍긴다. 사료도 산란용으로 바꾸고 알을 낳기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짚으로 짜서 걸어주어야 하지만 짚 구하기가 쉽지 않아 항아리 안에 겨를 깔아 아늑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후 닭들은 항아리에 들어가 알을 낳았다. 일주에 열 댓 개 씩 알이 생겼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한 마리가 항아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알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닭이 모이를 먹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알에 매직으로 번호를 썼다. 새로 낳는 알과 품는 알이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달력에 날짜를 동그라미 쳐 놓았다. 세이레가 어제로 흐르고 병아리가 태어났다. 그것도 네 마리씩이나. 작은 생명들이 풀어 놓는 삐악 소리가 닭장 안을 가득 채운다. 기쁨과 동시에 걱정이 몰려온다. 닭장 안 틈새를 통해 쥐도 드나들고 주말엔 길고양이도 문턱을 넘나든다. 평소에는 쥐도 살려고 태어난 것인데 먹고 살아야지 싶어서 닭장으로 드나드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또 대접에 사료를 담아 뒤란에 놓아두고 길손처럼 들르는 고양이가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쥐나 고양이가 혹시 병아리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정오의 뙤약볕처럼 머릿속을 파고든다. 시멘트 한 포를 사 와서 물에 갰다. 쥐가 드나들 만한 틈을 꼼꼼히 바르고, 철망으로 된 불고기판으로 닭장의 사방을 두른다.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런데 길고양이가 문제다. 닭장 문을 열어 두는 주말, 고양이가 닭장 안에 들어가서 닭에게 준 음식 찌꺼기를 먹곤 했다. 고양이도 가끔은 간식을 먹어야지 싶어서 그저 모른 척했다. 그런데 이젠 다 걱정이다. 고양이의 밥그릇을 닭장에서 멀리 떨어진 테라스 앞쪽으로 옮겨 사료를 담아 놓는다. 문제는 닭장 안으로 길고양이가 어떻게 안 들어가게 하느냐이다. 나는 고심 끝에 닭장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놓는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 책을 펴고 태블릿을 켠다. 닭들의 파수꾼이 되기로 한다. 호밀밭이 아닌 닭장의 파수꾼.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어주니 닭들이 우르르 나와 마당에서 풀을 뜯고 벌레를 잡으며 논다. 어미 닭은 한동안 닭장 안에서 새끼들을 돌보는가 싶더니 밖으로 나온다. 네 마리 병아리 중 하양이가 먼저 어미를 따라 밖으로 나온다. 어미는 나머지 새끼들이 염려되었는지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하양이는 어미를 따라 들어가려다 판자로 덧대어 놓은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울고 있다. 나는 벽돌 하나를 주워 닭장 앞에 놓아준다. 그제야 벽돌을 밟고 닭장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어미 닭이 다시 나오고 나머지 병아리들도 벽돌을 밟고 줄줄이 나온다. 하양이 까망이 얼룩이 회색이 각기 모양이 달라 쉽게 구별을 할 수 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다. 햇살이 뜨거워진다. 모자를 쓰고 다시 병아리를 보다 책을 보다를 반복한다. 아니나 다를까 길고양이가 등장한다. 고양이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어슬렁어슬렁 닭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나는 "양이야 안 돼! 네 밥 앞에 놓았어"라고 한다. 멈칫 나를 쳐다본다. 난 앞 테라스에 가서 대접에 담긴 사료를 들고 와 고양이에게 보여준다. 양이는 알아듣는지 마는지 그저 나만 쳐다본다. "밥 앞에 놓을게, 여긴 안 돼!" 말하고, 사료 그릇을 테라스로 갖다 놓고 돌아온다. 밭쪽으로 실룩샐룩 사라지는 양이의 엉덩이가 보인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은 "병아리가 걱정 돼서 잠은 어찌 자누? 닭장 앞에서 밤 새겠어" 하며 웃는다. 그 작은 알에서 생명이 태어나다니. 얼마나 신기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이 무더위에 항아리 속에서 꼼짝하지 않고 삼 주를 품은 암탉도 대견하고 무사히 깨어나 준 병아리들도 대견하다. 중닭이 될 때까지 내 집필실은 닭장 앞이다.
그녀가 느닷없이 내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 대학 시절 우리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었다. 졸업 후 각자 저마다가 선택한 공간으로 들깨처럼 흩어졌다. 나는 청주를 지키며 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 연유로 타지로 흩어진 친구들이 들렀다 날아가는 방앗간 역할을 한다. 가끔 공간을 건너 그들은 내게로 오곤 했다. 12년 전 어느 날, 그녀가 청주에 잠시 들러 저녁을 먹고 헤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청주에 올 일이 있다고 한다. 바쁘지 않으면 잠시 보자고 톡이 왔다. 난 톡을 날렸다. 무지 바쁘지만 12년 만에 친구가 보자고 하니 시간을 내 보겠다고. 그녀가 오기로 한 화요일, 하필 그날은 퇴근 후 일정이 두 개나 있는 날이다. 문인협회 월례회가 있고, 줌(ZOOM)으로 시 합평이 예정되어 있다. 문인협회는 재무를 맡은 탓에 꼭 참석해야 하고, 줌 합평도 세 명이 하는 거라 빠지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그녀를 위해 시간을 짜보기로 했다. 곰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셋 다 하기로 했다. 문인협회는 한 시간을 일찍 가서 회비 입금현황을 설명해 주고 살짝 빠져나와 줌으로 들어갔다. 합평하는 동인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혹시 줌 영상에서 내 모습이 사라지면 일이 있어서 나간 거로 생각하라고. 일정을 마친 그녀가 톡을 보내왔다. 명암저수지에서 잠시 보기로 했다. 나는 부랴부랴 물을 끓이고 차를 타서 보온병에 넣고 종이컵 두 개를 챙겼다. 그리 고울 것도 미울 것도 없었던 그녀, 새삼 설렘으로 다가오는 것은 내 젊은 날의 기억을 담고 오기 때문이리라. 저수지에는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식사하러 나온 사람, 벤치에서 이야기하는 사람 등 수 많은 인파가 넘실거렸다. '비어있는 벤치가 있을까? 어디에 앉아야 하나?' 골몰하며 주차하는 순간 친구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때마침 앞 벤치의 사람들이 일어난다. 난 손을 흔들며 친구에게 소리친다. "오랜만이야~ 저 앞에 벤치 맡아 어서~!" 친구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듯 엉거주춤 서 있다. 나는 주차를 하자마자 벤치로 뛰어가 자리를 선점한 후 친구에게 이리 오라고 손가락을 말아서 흔든다. "커피숍 안 가고?" 묻는 친구에게 대답한다. "바람 좋은데 뭘 갑갑하게 거기에 가. 여기서 얘기하자." "똑같네! 청바지가 어쩜 그리 잘 어울리냐?" 하자 씩 웃는 친구. "잘 지내지? 어찌 살았어?" 조곤조곤 말을 잇는 그녀는 어제 본 사람처럼 편안하다. 큰아이는 시집을 갔고 작은 아이는 홍콩에 있는 직장에 다닌다고 한다. 그녀는 한동안 제주 모슬포에 살았다고 한다. "서울 살지 않았어?" 묻자 서울에서 제일 오래 살았는데 제주에서 살아보고 싶어서 그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천에 터를 잡고 텃밭도 일구고 정원도 가꾸며 소소하게 산다고 한다. 바쁘게 사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직장은 언제까지 다닐 거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제일 부럽다고. 나는 그렇지 못해서 정년을 채워야 할 것 같다고. 그러자 그녀는 누구나 자유를 갈망하지만,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너는 자유로워 보이는데?" 하자 그렇게 보일 뿐이란다. "가진 거 그냥저냥 쓰면서 살면 죽을 때까지 걱정 없는 거 아냐?" 하자 가진 것을 헐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걸 지키며 사느라 힘든 거란다.청주에 오면 또 연락하라고 하자 그녀는 그러겠다고 한다. 언제 다시 마주할지 모르는 그 미지의 시간을 두고 우리는 빈 약속을 한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내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시간은 선택의 여지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지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공간은 자신의 의지와 필요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고 남는 것이 아닐까. 내가 청주를 선택하고 아직도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나는 십 년 후에도 사라진 시간을 아쉬워하며 청주 살고 있겠지. 달달한 청주의 초여름 훈풍이 머리칼을 적신다.
폐암 진단을 받고 마음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우리 곁을 떠날 줄은 몰랐다. 대구에 다녀오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 언제 와요? 철이가 이상해요." 작은아들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소변을 보고 나오다 비틀거리며 쓰러졌어요. 안아서 이불 위에 눕혔는데, 숨이 거칠고 누운 채로 똥을 쌌어요. 움직이질 못해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항문이 열린 것을. "지금 대구에서 가는 길인데, 한 시간 반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 철이 옆에 꼭 있어!" 전화를 끊고 한 시간이 지났을까 작은아들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밀려왔다. "철이가 숨을 안 쉬어요." 눈앞이 흐려졌다. 남편에게 전화를 하고, 충주에 사는 큰아들 번호를 눌렀다. 큰아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이에요? 이렇게 빨리요? 6개월 정도는 시간이 남아있다고 했잖아요. 주말에 철이 보러 갈 걸 그랬나봐요." 아들은 바로 기차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 두 아들이 초등학교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철이가 처음 우리 집으로 왔다. 그는 우리 집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살았더랬다. 정신없이 달려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자 작은아들은 숨 없는 철이를 안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는 눈도 감지 못한 채 굳어가고 있었다. 눈을 감겨주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을 쓸어주었다. 커다란 상자를 가져와 담요를 깔고 그를 눕혔다. 그가 덮던 이불을 덮어주고 주변에 꽃을 빼곡하게 놓았다. 마치 잠든 오필리아를 보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그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운 목소리로 짖을 것 같다. 마지막 밤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그의 오른쪽에 요를 폈다. 그동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떠다녔다.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그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떻게 아침이 왔는지, 눈을 떠보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온 가족이 거실에서 자고 있다. 남편은 소파에 큰애는 철이 아래에 작은 애는 철이 왼쪽에 누워있다. 우리는 서로의 퉁퉁 부은 눈을 보며 거실을 정리하고 문을 나섰다. 수목장을 하기로 했다. 공군사관학교 앞 묘목 가게로 갔다. 주인에게 물으니 칠자화가 좋겠다고 한다. 두 번 꽃을 피우는 나무란다. 여름에 하얀 꽃을 한 번 피우고 가을에 빨간 꽃을 또 한 번 피운다고 한다. 삶을 접는다는 것은 육신을 놓고 영혼은 어딘가로 가는 것이리라. 그가 빨리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지로 싸기로 했다. 딱딱한 철이를 들어 노란 한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 초록 한지로 끈을 만들어 위아래를 묶어주었다. 칠자화를 심고 그 옆 구덩이에 철이를 넣는 순간 새들이 후드득 침묵을 깨고 날아간다. 우리는 둘러서서 마지막으로 철이에게 하고픈 말을 한다. 그동안 우리와 함께해 줘서 고맙고, 사는 동안 우리에게 행복을 줘서 고맙고, 더 고마운 건 마지막 순간까지 많이 아프지 않고 떠나줘서 고맙다고. 흙을 한 삽씩 떠 넣고 고갤 숙인다. 처마 밑 풍경이 쨍그랑 쨍그랑 울고 있다. 그의 물건을 정리한다. 후드티, 민소매 티, 목줄, 이름과 전화번호가 새겨진 목걸이, 아직 못다 먹은 영양제, 눈약, 닭고기 통조림, 그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장독대에서 항아리 뚜껑을 들고 와, 그의 체온이 묻어 있는 것들을 올려놓는다. 작은아들이 철이의 목걸이를 뺀 후 더미에 불을 놓는다. 사라지고 있다. 철이의 온기가 묻어 있는 것들이 하나 둘, 검은 재가 된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칠자화 가지에 걸어주고 고개 숙인다. 그가 이승에서 한 번 꽃으로 피었으니, 저승에서도 두 번째 꽃을 활짝 피우길. 이승과 저승을 관장하는 누군가에게 빌고 또 빌어본다. 마당에 핀 꽃 잔디가 응답하듯 파르르 떨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풍경소리 번지는 마당으로 발을 딛는다. 소소리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파르르 떤다. 떨고 있는 잔가지를 어루만지듯 가지 사이로 볕뉘가 비친다. 수없이 뻗어있는 가느런 가지 끝, 껍질을 깐 삶은 달걀 같은 하얀 봉우리들이 가득하다. 겨우내 못다 한 이야기를 하려는지 입을 살짝 다문 잎들이 한껏 부풀었다. 나무 밑동을 본다. 나무가 살아온 세월을 말해 주는 듯 푸른 이끼를 달고 있는 울퉁불퉁한 껍질이 꼭 노인의 몸피 같다. 손을 대자 거친 감촉이 가득 만져진다. 거무튀튀한 나무껍질이 한 톨 떨어진다. 굴러떨어지는 나무껍질을 따라 시선을 떨군다. 바닥엔 맥문동이 쥐똥 같은 씨앗을 달고 납작하게 누워있다. 지난해에 여물었을 검은 씨앗이 겨울의 세찬 바람 속에서도 잎을 꼭 쥐고 붙어있다. 씨앗을 따서 이리저리 살핀다. 씨앗 위를 새소리가 덮는다. 눈을 드니 직박구리가 부푼 꽃들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다 허공으로 사라진다. 소리 따라 허공으로 시선을 던진다. 바람의 입김에 움찔 가지가 물결친다. 내 마음도 따라서 움찔거린다. 벌써 봄이 성큼 다가왔다. 벙글어가는 하얀 목련꽃을 보자 그녀의 뽀얀 얼굴이 스친다. 늘 목련처럼 환하게 웃는 그녀. 그녀가 오랜 도전 끝에 이직을 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직업이었기에, 요즘 그녀의 날씨는 아주 맑음이란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 행복한 나날이라고 한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며 뽀얀 미소를 날리는 그녀가 한없이 귀엽다. 그런데 직업이 바뀌고 나니 주변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와 표정마저도 바뀌었다고 한다. 전에는 서류를 갖다 내면 "거기 두고 가세요!"라고 하며 한겨울 북풍처럼 눈도 마주치지 않던 직원들이, 요즘에는 "도와줄 것 없으세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라며 오뉴월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를 날린다고 한다. 만나는 아이들마저도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억새처럼 뻣뻣했었는데, 이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면 "네." 하고 엿가락처럼 말랑해졌다고 한다. 매일 뜨는 태양도 자신을 위해 떠오르는 것 같고, 새들도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것 같단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날아갈 것 같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변한 게 아니고 너의 마음가짐이 변한 거 아니야?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봐~!" 그러자 그녀는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다른 사람이 너를 대하는 태도나 시선에 마음을 두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에 지향점을 가져보라 말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그녀에게 말하면서 내 마음을 또 한 번 다져 본다.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는 늘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녀를 보며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떠올린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라는 화양연화. 누구나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그 시기는 다 다르게 올 수 있지만 한 번 쯤은 그런 시기가 있을 것이다. 화영연화를 유년기에 맞을 수도 있고, 학창시절에 맞이할 수도 있으며 어쩌면 노년기에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화양연화는 지금이 아닐까. 43세에 결혼을 하고 45세에 아이를 낳고 그리고 46세에 평생 직장을 갖게 된 그녀. 그녀의 화양연화는 40대인 것 같다. 그러니 얼마나 행복하랴. 그녀가 행복해 하니 나도 덩달아 구름을 탄 것 같다. 그녀의 화양연화가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고운 미소로 주변을 더 밝게 물들였으면 좋겠다. 아직은 이른 봄, 싸늘한 바람을 다독이며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 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하얗게 벙글어가는 목련 위로 풍경소리가 쨍그랑거리며 떨어진다. 마치 그녀의 청량한 웃음소리처럼. * 이른 봄의 맵고 스산한 바람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활주로를 벗어나 검은 하늘 속으로 날개를 펼친 비행기의 굉음이 귓속으로 엎질러진다. 청주가 기체 아래로 점점 멀어진다. 제주를 처음 밟은 건 대학시절이다. 졸업여행 때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갔었다. 그때는 넘실거리는 젊음을 싣고 한없이 즐겁기만 한 곳이었다. 그 후 친구들과 때로는 가족들과 제주를 갔지만, 내겐 그저 낭만과 휴양의 섬으로만 기억되었다. 요즘 나는 제주에 대해 다시 알아가고 있다. 내가 알던 휴양과 낭만의 섬이 아닌 붉은 제주의 속살을 엿보고 있다. 밤을 헤치고 아픈 제주를 만나러 간다. 공항에 도착해 셔틀버스를 타고 렌터카 회사로 향한다. 예약한 차를 찾아 충북해양교육원으로 핸들을 돌린다. 곽지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방 안에서 밀려오는 밤바다를 보며 지도를 펼친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이번 여행 동안에 가야 할 곳을 메모한다. 제주시 동부권과 서부권을 시작으로 서귀포시 동부권과 서부권을 나눈다. 살필 곳들을 표시한 후 이불을 펴고 고요가 몸을 불리는 방에 눕는다. 어둠의 입자들이 하나 둘 내려와 고요를 덮는다. 햇살이 긴 손가락 뻗어 눈두덩을 간질인다. 창문 열고 알싸한 바람을 들인다. 외승을 나온 듯 곽지 해변의 모래 벌에 말 타는 사람들이 새벽을 가르며 달린다. 활기찬 새벽 풍경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운동화 끈을 졸라매고 관덕정을 지나 북촌 너븐숭이를 지나 다시 정뜨르 비행장을 보고 서귀포로 향한다. 가는 길에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 잠시 발을 멈춘다. 정낭 가로지른 대문을 넘어 손바닥 선인장이 가득한 마당으로 들어선다. 무명천 할머니로 더 잘 알려진 그녀가 살았던 조붓한 집. 작은 미닫이 방문을 연다. 조그만 제단 앞에 놓인 두 개의 촛불이 깜박인다. 향을 꼽고 손을 모은다. 문득 고개 드니 실겅 위엔 바구니가 있고 멈춰버린 달력이 빛바랜 채 벽에 걸려 있다. 방바닥에 곱게 개켜진 이불은 할머니의 성품처럼 정갈해 보인다. 빗발치는 총탄에 턱이 날아가 평생을 죽으로 연명하면서도 밝게 사셨다는 할머니. 운명을 관통당한 그녀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이렇게 작은 집에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치 조그만 할머니의 집을 뒤로하고 정방폭포로 향한다. 사스레피나무 서 있는 길을 지나 정방폭포로 들어선다. 깎아지른 절벽 위 소나무는 말이 없는데, 물줄기는 긴 머리 풀고 무엇을 이야기하는 건지 연신 중얼거린다. 깔깔거리는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폭포 속으로 스미고 나는 폭포 앞 바위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줄기를 본다. 굴비처럼 엮여 폭포 아래로 떠밀렸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죽음의 이유도 모르고 죽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라 했던가. 일렬로 세워진 후 총성이 들릴 때마다 수많은 그림자들이 온몸을 엄습했으리라. 붉은 섬으로 낙인찍혀 공포의 나날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 그들의 심정을 눈을 감고 그려본다. 감은 눈두덩 뒤로 그들의 눈물인 듯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숨을 고른다. 편의점 유리문 위로 비가 내린다. 매대에 있는 미역국밥을 골라와 밥을 넣고 물을 넣고 미역을 넣고 액상스프도 넣고 전자레인지에 넣는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창가에 앉아 생각에 젖는다. 비 오는 날 홀로 컵밥을 먹는 꼬질꼬질한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아르바이트생이 계속 내 주위를 맴돌며 매대에 컵밥들을 진열하는 척하며 흘끔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창가에 앉아 비를 보며 붉은 섬을 생각한다. 제주의 봄은 참 아프다.
버스에서 내려 두근거리는 첫발을 떼는 순간 눈발이 날렸다. 막막하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주인공 나인틴헌드레드의 기분이 이랬을까. 평생을 배 안에서 살았던 피아니스트. 88개의 건반이 세상의 전부였던 그가, 버지니아 호와 항구를 잇는 마지막 트랩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내 발끝으로 훅 밀려드는 것 같다. 전철을 타야 하나 버스를 타야 하나 택시를 타야 하나 머릿속이 소란하다. 인터넷을 검색한다. 숙소까지 가려면 전철은 세 번을 갈아타야 한다. 버스는 길을 건너고 한참을 걸어야 한다. 택시는 요금이 장난이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한다고 해도 만만하지 않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듯. 편리함을 추구하면 금전이 나가는 것이고, 비용을 줄이려면 몸이 고생을 해야 한다. 곰곰 생각 끝에 택시를 타기로 한다. 경제적인 손실은 제일 크겠지만, 눈이 쌓이는 낯선 도시에서 홀로 헤매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택시 승강장에 도착하니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반가이 웃으며 차 문을 열어준다. 얼떨결에 올라타자 또 문을 닫아준다. 청주에서 택시를 탈 때는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닫았데, 낯선 풍경에 어리둥절하다. 난 '서울은 이렇게 친절한 곳이구나.' 생각하며 인사를 한다. 기사님은 넉넉한 목소리로 "어디로 모실까요?" 한다. 여의도에 갈 거라고 하자, 그쪽은 집값이 비싼데 어쩐 일로 가냐고 묻는다. 볼일이 있어 간다고 하니 거긴 아무나 사는 곳이 아니란다. 그러면서 나를 흘끔 쳐다본다. "저는 거기 안 살고요, 촌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한다. 내가 어리숙해 보였는지 기사님은 은근슬쩍 종교가 뭐냐고 묻는다. 나는 나 자신도 안 믿는 사람이라 하자 본인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 교회를 못 간다고 하자 작은 책자를 내밀면서 읽어보라고 한다. 하늘색 표지에 '한 절 묵상 신구약' 이라고 쓰여있다. 책을 펴서 대충 목차를 살펴본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이 도시를 용서하겠다, 인생의 밤을 극복하려면' 등등 삶에 유용한 읽을거리가 있을 듯하다. 책을 보고 있는데, 기사님이 4대 성인을 아냐고 묻는다.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이라 잠시 버벅거리다가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예수 아니냐고 대답을 한다. 기사님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4대 성인 중 예수만 신이라는 사실을 아냐고 묻는다. 알 턱이 없는 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 이유를 혼자 머릿속으로 찾아보지만 찾아질 리 만무하다. 침묵을 깨며 기사님이 말을 한다. 그 이유는 예수만이 무덤이 없기 때문이란다. 나는 종교는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 교회에서 맛있는 것을 많이 줘서 자주 갔었다고 동문서답을 한다. 기사님은 본격적으로 종교에 대해 연설을 하더니, 소원이 뭐냐 묻는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올해 문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한다. 기사님은 자신이 기도해 주겠다며 명함을 달라고 한다. 중보기도의 힘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누구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은 나쁜 일 같지 않아 명함을 건넨다. 그러면서 우연히 미터기 불빛에 시선이 갔다. 허걱~ 요금이 장난이 아니다. 깜짝 놀라서 "기사님 요금이 많이 나오네요? 인터넷으로 예상 요금은 미리 검색했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많이 나올 것 같아요." 하자 기사님은 "이건 모범택시예요." 한다. "그게 뭐예요?"라고 묻자, 요금은 일반 택시보다 비싸지만 안전하게 모시는 택시란다. 간이 콩닥콩닥한다. 어쩐지 도에 넘치게 친절하더라. 택시에서 내리니 눈발이 더 세차게 내 온몸을 휘감는다. 먹먹하다. 코 잡고 다녀야겠다. 낯선 서울, 사흘 간 무사히 건널지 걱정이다. 벌써 청주가 그립다. '한 절 묵상 신구약' 책의 목차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며 활자로 말을 건넨다. '강하고 담대하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며 이 도시를 용서하라.'
우리 집엔 닭이 세 마리 산다. 수탉 한 마리와 암탉 두 마리다. 그런데 그 한 마리밖에 되지 않는 수탉이 얼마나 울어대는지. 새벽 3시만 되면 벌써 목에 핏대를 세운다. 주말에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게으른 내 마음에 죽비를 내리듯 여지없이 울어댄다. 아무리 부지런해도 그렇지 3시는 너무한 시간이다. 그런고로 나는 닭 키우는 것이 달갑지 않다. 싱싱한 유정란을 먹는 것은 좋으나 사룟값과 빼앗기는 내 잠의 가치를 따지고 보면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니다. 게다가 닭장도 치워줘야 하고 물도 수시로 갈아 줘야 하고 수탉이 우는 것이 미안해서 앞집에 죄송하다고 연신 머리도 조아려야 한다. 그런데 남편은 닭을 더 키우기를 원한다. 그래서 자꾸 친정에 가자고 애처럼 보챈다. 성화에 못 이겨 친정에 갔다. 남편은 닭장으로 가서 청계를 세 마리 골라왔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는 당부한다. "닭이 새로 이사 오면 텃새를 하는 거야. 그걸 막으려면 기존의 닭똥을 새 닭들에게 묻혀줘야 한대. 안 그러면 저번처럼 뒤통수가 피범벅이 되는 거 알지?" "응." 남편은 건성으로 대답을 한다. 몇 해 전에도 새로운 병아리 한 마리를 입양해 왔었다. 그런데 다른 닭들이 그 병아리를 공격해서 매일 뒤통수에 칸나꽃이 피었었다. 결국 그 병아리가 다 클 때까지 격리해서 키웠다. 집으로 돌아와 닭장 문을 열자 기존의 닭들이 산책하러 나간다. 틈을 타서 새 닭을 들여놓았다. 나는 닭똥을 묻혀주었는지 확인한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을 그냥 닭장에 깔린 왕겨를 몸에 뿌려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화가 난 나는 똥을 묻혀 줄 요량으로 닭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좀 전까지 있었던 닭 세 마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산 쪽으로 난 돌계단에 올라가 산속을 살폈다. 보이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와 계곡을 둘러보았다. 없다. 혹시나 하여 대문 밖으로 나가 윗마을 쪽으로 한참을 걸었다. 그림자도 뵈지 않았다. 얼마나 찾았을까.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다. 둘이 양쪽으로 나뉘어 찾는데 남편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 있어~." "어디 어디?"하면서 남편의 목소리를 따라갔다. 닭장 옆에 쌓아놓은 비닐 속에서 검은 물체가 두런거렸다. 남편은 닭을 살살 몰고 나는 닭장 문을 연 뒤 닭장 문을 벗어난 공간에는 커다란 파라솔을 펴서 닭장 쪽으로 닭을 유도했다. 간신히 한 마리가 닭장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집 주변을 살피며 돌고 또 돌았다. 마루 밑에 뭔가가 있다. 분명 아까도 몇 번을 눈으로 뒤적이던 마루 밑, 그때는 없었는데 지금 희미한 형체가 보인다. 남편은 장대를 들고 와 마루 밑 공간을 훑으며 끌고 다닌다. 이리저리 피하는 닭을 몰았다. 한참을 씨름 후 드디어 닭이 마당으로 나온다. 다시 닭장 문을 열고 나는 울타리처럼 서서 닭이 닭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유도한다. 이제 한 마리 남았다. 또 집과 산과 계곡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러나 삼십여 분을 찾아도 뵈지 않는다. 어둠이 마당 가득 내려와 머리를 푼다. 더는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다 그 닭의 운명이라고 말하며 집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현관문을 열다가 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살펴보겠다며 뒤란으로 갔다. 그런데 뭔가 작고 검은 물체가 닭장 앞에 서 있다. 바람 부는 뒤란에 홀로 떨고 있는 중닭 한 마리. 나는 닭이 숨어버릴까 봐 살금살금 남편을 불러왔다. 그리고 닭을 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닭이 이리저리 피하더니 헛간의 나뭇더미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무를 드러내려고 하자 더 깊은 곳으로 숨는 닭. 깊고 틈이 작은 더미 속으로 들어가 손도 들어가지 않는다. 남편은 노루발못뽑이(Crow Bar)를 가져와 나무를 들어 올리며 나보고 닭을 잡으라 한다. 남편이 온 힘을 모아 공간을 넓혀 준다. 그 틈으로 겨우 손을 넣어 닭을 꺼낸다. 닭장에 넣어주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왔다면 닭은 어찌 되었을까. 밤새 산에서 내려온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을 게 뻔하다.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번 더 심호흡하고 최선을 다하면 길이 보인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왕 가족이 되었으니 닭들이 우리 집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올해도 잠을 설치겠다.
어느새 5학년이 되었단다. 어깨를 살짝 덮은 생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뽀얀 얼굴, 반짝이는 검은 눈과 야무진 입매, 아이가 숙녀티를 내며 내 앞에 나타났다. 아이를 처음 만난 건 7살 때였다. 작은 키에 카랑한 목소리를 가진 아이에게 동화 구연을 지도했다. 오전엔 24명의 아이들과 정신없이 수업하고, 오후엔 밀려드는 공문을 처리하는 와중에 틈을 내어 매일 아이를 가르쳤다. 구연하는 자세, 성량 조절법, 얼굴 표정, 그리고 무대 매너 등을 알려주었다. 아이는 힘든 내색 없이 잘 따라 주었다. 석 달 여를 그렇게 연습한 아이는 충북동화구연대회에서 1등을 해 당당하게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 작고 당차던 작은 아이가 몰라보게 커서 인사를 한다.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시민과 함께하는 시 낭송회에 학생을 출연시켰으면 좋겠다는 집행부의 제의를 받고 내 머리에 퍼뜩 떠오른 아이였다. 아이의 보호자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좋은 경험이 될 거라며 기쁘게 전활 받았다. 그런데 며칠 후 집행부에서 연락이 왔다. 출연하려면 PCR 검사 증명서와 출연자 교육을 받은 이수증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콧속에 면봉을 쑤셔 넣어서 하는 검사가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알기에 멈칫거렸다. 아이에게 큰 무대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 마음에 추천했는데, 괜히 번거롭게 한 것 같아 망설이다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엄마는 밝은 목소리로 그리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주 후 예술의 전당 공연장에 불이 밝았다. 안전과 방역을 위해 최소한의 인원이 함께한 조촐한 행사였다. 훌쩍 커버린 아이의 모습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다만 엄마의 모습이 변하지 않아 엄마를 보며 아이를 단박에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이를 보자 그 시절이 몰려왔다. 수업 후 매일매일 아이와 씨름했던 날들이 필름처럼 스쳐 갔다. 돌아보니 뜨거웠던 내 젊은 날이었다. 아이를 보자마자 "은우구나! 많이 컸네."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수줍은 듯 미소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를 했다. 시간이 없으니 리허설을 하자며 난 아이를 데리고 무대로 향했다. 마이크 사용하는 법과 무대에 입장하는 법 그리고 퇴장하는 법, 청중에게 인사하는 법 등을 알려주고 아이에게 해 보라 했다. 아이는 예전의 그 당당하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시들거렸다. 무대에서 몸을 꼬며 인사하는 모습에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조명 아래 아이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인사를 한 아이는 낭송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며 한동안 불빛 아래 흔들리는 촛불처럼 서 있었다. 아마도 머릿속이 하얗게 됐나 보다. 나는 아이에게 내려오라 한 후 괜찮다고 다독였다. "집에서는 다 암기했었는데 생각이 잘 안 나요." 하며 아이는 울상이 됐다. "긴장했구나. 생각 안 나면 보고하면 돼. 원래는 낭송하는 게 맞지만, 낭독을 해도 괜찮아!"라고 아이를 안심시켰지만, 낭송을 기대했던 내 마음엔 먹장구름이 드리워졌다. 드디어 낭송회가 시작되었다. 여는 무대로 유명한 연극인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낭송하고, 하늘거리는 무용수가 그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리고 시민들이 낭송을 시작했다. 낭랑하고 고운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 구절들이 도통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아이가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드디어 아이의 낭송 시간이다. 나는 무대에 오르는 아이를 보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매만졌다. 내가 낭송할 때보다 몇 배는 더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음악이 깔리고 아이가 낭송할 시가 뒷배경에 자막으로 올라갔다. 아이는 인사를 하고 마이크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나는 두 손을 모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이는 누구보다도 또렷하고 정확한 목소리로 아름답게 시를 낭송했다. 행과 행 사이의 휴지기도 연과 연 사이의 구분도 정확히 지키면서, 시에 감정까지 넣어 낭송하는 게 아닌가. 우레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아이는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내려온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온 세상에 달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제자가 관중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앞으로도 아이들 지도에 최선을 다하여, 언제 어디에서도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데 조금이라고 기여할 수 있는 교사가 되길 소망한다. 아이가 커서 자신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살면서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휴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의 시간이 흐르고 바람의 시간이 흐르고 도시의 시간이 흐른다. 저마다의 속도로 흐르는 시간이 노을에 젖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창밖 풍경 보며 멍 때리기다. 어둠을 밀어내는 새벽 창밖, 비 오는 날의 빗소리가 몰고 오는 아슴한 창밖, 휴일 오후 놀이터에서 아득하게 들리는 아이들 목소리와 함께 보는 햇살 내리쬐는 창밖 등 어느 하나 가슴 적시지 않는 풍경이 없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해 질 녘 창밖 풍경이 제일 좋다. 칸나 빛으로 물들어가는 서녘 하늘은 매일 봐도 매일 보고 싶다. 차 한잔을 손에 쥐고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보면 내 안에 담긴 여러 가지 감정들이 모양을 바꾼다. 처음엔 미어지는 느낌이다가 다음엔 뾰족한 칼날로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다가 어느 순간엔 따듯한 체온이 가슴속에 천천히 번지는 느낌이다. 마치 한지에 물이 퍼지듯이. 퇴근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차를 한잔 타서 베란다로 향하는 것이다. 베란다엔 초록 의자가 창밖을 내다보기 좋은 위치에 놓여있다. 의자 위엔 노란 우비 입은, 구름빵 인형 홍비와 홍시가 앉아 있다. 내가 집을 비운 낮 동안은 홍비, 홍시가 창밖 풍경을 눈에 담는다. 매일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서둘러 차향을 맡으며 의자에 앉는다. 그때가 노을이 가장 절묘하게 번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눈은 창밖으로 조준한다. 한참을 그렇게 머리를 텅 비우고 저물어가는 하루를 배웅한다. 하늘이 얼굴 붉히며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에 흠뻑 빠진다. 따듯한 차가 입안을 구르다 목젖을 지나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그 안온한 느낌이 좋다. 지친 몸이 포근하게 데워지는 기분이랄까. 나를 다 내려놓고 풀린 눈빛으로 맞이하는 저녁, 아무 생각 없이 삼인칭 시점이 되어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먼 하늘 아래 짙푸른 산이 노을에 젖고 산의 어깨쯤엔 철탑 두 개가 씩씩하게 서 있다. 아파트 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은 길을 끌고 산으로 오르고, 산은 길을 말 없이 받아주고 있다. 차들은 아스팔트를 긁으며 황혼 속을 질주하다 신호등에 멈춘다. 빨간 불에 멈춘 하얀 차가 장난감처럼 보인다. 허리가 긴 버스 한 대가 회전축을 그리며 우회전한다. 차도 옆 초등학교 부지엔 풀들이 키를 뽐내며 즐비하게 서 있다. 언젠가 저 풀의 시간도 자리를 내어주고 학교가 들어서리라. 문득 내려다 본 402동 앞에는 한 노인이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물고 있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 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흐르는 저녁이다. 한동안 붉게 끓던 노을이 어둠에 자리를 내어준다. 한소끔 끓고 난 뒤 앙금을 가라앉히듯 어둠의 입자가 소리 없이 내려와 저녁을 채우고 있다. 오늘도 여지없이 창밖에 정신을 떼어주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밥 언제 먹어요? 제가 오늘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 오늘은 너무 오랫동안 정신을 놓았나 보다. 멍 때리던 정신을 주섬주섬 챙겨서 일어난다. 이제 엄마로 돌아갈 시간이다. 살림에는 도통 취미가 없어서 늘 허둥대는 엄마지만 저녁을 준비한다. 이렇게 매일 풍경을 볼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각이 있고 따듯한 차를 맛볼 수 있는 미각이 있고, 노을의 시간과 악수하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가슴이 있고, 그리고 작지만 내 몸 누일 수 있는 집이 있고, 나를 언제나 지원해 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아직은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하루를 정리하는 저녁처럼 인생의 황혼에 서서 욕심부리지 말고 내 길을 가리라. 서서히 어둠에 몸을 내주는 노을처럼 기꺼이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리라.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다른 사람의 가슴을 따듯하게 물들이는 저녁놀 같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밤새 비가 내렸다. 빗줄기를 타고 여름이 가고 있다. 소란했던 매미 울음소리도 들끓던 대지의 열기도 차분히 식혀주는 빗소리, 소란하던 머릿속도 가지런히 빗겨주며 잠시 쉬게 한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여름을 생각했다. 여름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의식하며 맞는 여름은 몇 번째 여름일까. 앞으로 몇 번을 더 여름을 맞을 수 있을까. 여름을 어떻게 건너야 하는가. 내가 여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번 여름은 오롯이 혼자만의 여름을 살기로 했었다. 노트북 하나 책 몇 권을 들고 일상을 떠나 여름 속으로 들어갔다. 홀로 된 여름 속에서 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굴러다니는 단어들을 그러모아 활자로 옮기기로 했다. 나를 들여다볼 수록 아무것도 꺼낼 것 없는 빈 깡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수없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세상은 소리 없이 움직인다고 늘 만하면서도 정작 나는 덜그럭거리며 살았다. 더 많이 채워야 소리가 안 나리라. 한 달을 뒤적였지만 손에 쥔 것은 많지 않았다. 겨우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꺼내 출판사로 넘겼을 뿐. 밤새 여름을 씻기던 빗줄기가 잦아들고 있다. 나를 텅 비우고 나니 바람이 보고 싶어진다. 바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을 검색한다. 태백, 그곳에 가면 바람을 오래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동안 벽으로 막힌 방 안에서 보이지 않는 나만 뒤적이다 보니 제대로 된 바람을 맞아 본 것이 언제인지 가물거린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이름만으로 가슴이 펑 뚫리는 것 같다. 바람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바람은 내게 어떤 말을 전해 줄까. 바람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새벽 여섯 시 청주를 출발해 제천역에 도작했다. 언제 단장을 한 걸까. 역은 완전 새 옷을 갈아입었다. 기억 속에 작고 정겨운 역은 어디에도 없었다. 약초를 팔던 자리도 국화꽃을 말려서 차로 팔던 가게도 사라졌다. 반짝이는 역을 걸으며 쾌적해서 좋긴 했지만, 왠지 소중한 기억이 지워진 것 같아 서운했다. 제천에서 머물던 삼 년 동안의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다녔다. 추억은 그날보다 아름답다 했던가. 아득했던 그 날들이 포근함으로 나를 감싼다. 제천에서 태백까지 가는 기차에 몸을 담는다. 여름이 창밖으로 휙휙 스친다. 매봉산 입구에서 바람의 언덕까지 걷는다. 굽이굽이 깔린 길을 따라 산을 오르는데 양옆이 온통 배추밭이다. 차마 고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배추 고도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배춧속을 걸어 바람의 언덕에 오른다. 풍차들이 여기저기 서서 바람을 휘감고 있다. 손을 뻗어 바람을 만져본다. 한참을 언덕에 서서 바람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없는 듯 있는, 있는 듯 없는 바람. 그렇게 사는 것은 얼마나 담대한 삶일까. 여름을 몇 번 더 나야 바람처럼 초연할 수 있을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경전의 말씀을 되뇌어 본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사는 건 어떤 것일까. 아직도 누군가의 말에 파르르 하고 누군가의 행동에 상처를 받으며 삐걱거리는 나를 본다. 뾰족하게 선 손톱은 그물을 상하게 하리니. 날 선 손톱을 갈아내고 둥글게 살아가라고. 있어도 없는 척,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처럼 사는 일이라고 내게 조곤조곤 말해 본다. 바람이 좋다. 바람의 언덕에 올라 형체도 없이 부는 바람 속에서 지는 여름을 바라본다.
새벽 다섯 시, 용대리의 하루가 열린다. 이곳에 온 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일어나자마자 산야초로 만든 효소 한잔을 물에 타서 목 안에 넘기며 생각에 젖는다. 적막한 산속, 풀벌레 소리가 고요를 허물고 있다. 여섯 시가 되길 기다려 아침 산책을 나선다. 하얀 모자를 쓰고 핸드폰을 든다. 신을 신다가 다시 들어와 쌀과자 두 쪽을 챙긴다. 마당 입구엔 호랑이 개 두 마리가 여름을 지키고 있다. 얼룩덜룩한 호랑이 무늬 옷을 걸친 그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나는 매일 아침 그들에게 쌀과자 한쪽씩을 던져주고 외출을 허가받는다. 처음엔 사납게 짖어대던 그들이 아침마다 과자를 상납하자 꼬리까지 살살 흔들며 흔쾌히 산책을 허락한다. 사나운 문지기에게 잘 다녀오겠노라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그들은 쌀 과자에 현혹되어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집 앞 다리를 건너 논길을 걷는다. 허공엔 거미줄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마치 누군가의 소식을 모아서 전해 주는 와이파이 표식 같다. 거미줄 속에는 갖가지 곤충들이 숨 없이 걸려있다. 싱싱했던 그들의 생을 압축해서 전시해 놓은 것처럼. 논은 초록 융단을 깔았다. 가지런하고 늘씬하게 자라고 있는 벼의 종아리를 훑다가 논바닥을 본다. 바닥엔 우렁이들이 평화로이 쉬고 있다. 그 옆 수로는 시멘트로 잘 정비를 했다. 시멘트벽엔 우렁이들이 핑크빛 알을 잔뜩 슬어 놓았다. 마치 껌을 씹다 붙여 놓은 것처럼 분홍 덩이들이 다닥다닥하다. 걷다가 고개를 드니 언덕엔 산딸기들이 붉은 눈망울을 굴리고 있다. 손을 뻗어 이슬 머금은 눈알을 따 입에 넣는다. 오돌거리며 혀 안에 씹히는 상큼한 즙이 싱그럽다. 들길엔 망초가 가느런 허리를 흔들고, 간간이 만나는 날개하늘나리꽃은 주홍색 입을 벌리고 웃고 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왜가리 울음소리, 산비둘기 구구 노랫소리, 참새 지저귀는 소리가 귓속으로 걸어온다. 소리에 소리를 덧입히듯 경운기 소리가 아침을 뚫고 지나간다. 이곳저곳에 눈을 팔다 보니 용대리 석교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에 건립된 다리 중 오늘날 형태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석교란다. 뭉툭하고 투박한 큰 돌로 쌓아 올린 자연 판석이 정겹다. 이쯤에서 발길을 돌린다. 돌아서며 전깃줄에 들깨처럼 앉아 있는 까마귀와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맑은 하늘을 앵글에 담는다. 돌아오는 길, 마을 끝에 개를 철창에 가두어 놓고 기르는 사육장이 있다. 첫날과 둘째 날은 나를 보고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우악스럽게 짖던 개들이 이제는 내 발소리에 익숙해진 듯 물끄러미 목소리를 지우고 나를 쳐다본다. "안녕 얘들아~ 잘 잤니?"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어 준다. 개들은 "끼잉 끼~잉" 답을 하며 애잔한 눈빛을 내게 던진다. 앞다리를 철장에 올리고 뒷다리로만 아슬하게 서서 애원하듯 쳐다본다. 나도 저렇게 지구라는 철창에 갇혀 시간에 사육되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것들은, 애쓰면 살아야 하는 것들은 너도 나도 다 애처롭다. 글을 낳는 집이 눈에 잡힌다. 집 입구에 누군가 등을 말고 앉아 있다. 가까이 가니 옆방에 묵고 있는 작가가 쪼그려 앉아 풀숲을 뒤지고 있다. 나를 보자 그녀는 풀꽃을 따와 팔목에 감아준다. 용대리의 싱싱한 하루가 환하게 웃으며 기지개를 켠다. 다시 시작이다. 어떤 시인은 시 쓰는 일은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마음과 같다고 했던가.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얼마나 쓸쓸한가. 나는 어떤 물고기일까. 무엇에 이끌려 여기까지 와서 시간 속을 헤매고 있는가. 그래도 비상을 꿈꾸는 물고기가 혼자만이 아니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