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년에 맞는 설이다. 북적거리는 명절을 보내고 고요히 앉아 처마 밑 풍경을 본다. 물고기가 허공에 그네를 타며 동그란 소리를 겨울로 날려 보내고 있다. 머릿속에 그날이 행복한 여운으로 쨍그랑거린다. 떡국을 끓여 아점을 먹고 친정을 향해 나선다. 남청주 나들목을 향해 가는 굴다리 밑, 전병 과자를 파는 노점상이 불쑥 눈 안으로 들어온다. 바람이 차가운지 패딩 모자를 뒤집어썼다. 과자 상자를 산처럼 쌓아놓은 채 차들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쌓인 과자 옆에는 한 박스에 오천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차창을 내리고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펴자 남자는 바람처럼 달려와 과자 상자를 안기고 간다. 상자를 뜯으니 그 안에 비닐로 포장된 과자가 나온다. 비닐을 걷고 과자를 본다. 둥글게 말린 모양, 삼각형 모양, 납작한 둥근 모양 등 다양하다. 노란색, 하얀색, 갈색, 그리고 갈색에 김을 붙인 과자 등 색깔도 다양하다. 과자가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뒤적여 본다. 생강 냄새가 확 밀려온다. 생강을 넣어서 만든 과자, 땅콩을 붙인 과자도 있다. 피가 얇은 과자, 두꺼운 과자 그야말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이렇게 많은 과자가 단돈 오천 원이라니. 뭔가 미안한 느낌이 머릿속에 안개가 피듯 번진다. 무어 그리 바쁜지 은행 들르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나들목 가는 길에 농협 24시간 코너가 있다. 무인 인출기에서 돈을 뽑는다. 집에서 챙겨온 봉투에 하나하나 이름을 쓰고 돈을 넣는다. '엄마 늘 건강하세요. 청주 딸.'이라는 문구를 봉투에 적고 마음을 담아 돈을 넣는다. 다음은 큰 조카에게 줄 봉투를 적는다. 군 제대를 하고 복학을 앞두고 있으니 봉투에 '새해에는 꿈을 꾸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라고 쓰고 용돈을 넣는다. 다음은 고 3이 되는 조카의 봉투에 '쉬엄쉬엄 공부하렴!'이라고 써넣고 현금을 넣는다. 그리고 이제 갓 돌이 지난 막내 조카의 봉투에는 '건강하게 쑥쑥 자라거라.'라고 써넣고 세뱃돈을 넣는다. 가족들에게 작지만, 마음을 전달 할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왠지 뿌듯함과 편안함이 몰려든다. 명절은 명절이다. 한 시간 이십 분이면 도착할 곳을 세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시댁에 간 동생에게 언제 올 거냐고 전화를 넣는다. 동생은 힘들어 죽겠다며 두 시간 후에야 출발한다고 한다. 나보다 네 시간 늦게 친정에 도착한 동생이 넋두리하기 시작한다. 명절 이틀 전부터 시댁에 가서 전 부치고 갈비 재우고 고사리 볶고 생선 삶고 허리가 휠 거 같다고 한다. 나를 보더니, "언니는 좋겠다."를 연발한다. 나는 시댁 어른이 다 돌아가셔서 동생보다는 명절에 대한 부담이 없다. 부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나도 전에는 다 했거든. 너무 부러워 마라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라며 농담 반 진담 반 내뱉는다. 결혼한 지 삼 년밖에 되지 않은 새댁이니 명절이 얼마나 낯설고 힘들지 가히 짐작이 간다. 더구나 어려운 시댁 식구들 틈에서 며칠간 음식을 하다 왔으니 얼마나 고되었겠는가. 그 마음을 십분 짐작하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어른들 있을 때 잘해. 얼마나 사시겠냐. 어른들 안 계시면 가고 싶어도 명분이 없어서 못 간다." 그러자 동생은 우리나라 남자들은 결혼만 하면 효자 코스프레를 한다면서 투덜댄다. 그런 그녀에게 이제 친정이니 마음 놓고 쉬라고 등을 토닥여 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음식을 가득 챙겨주는 우리 엄마. 엄마의 마음을 한 차 가득 싣고 청주로 돌아온다. 내가 얼마나 더 이 길을 가고 올 수 있을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과연 나는 이 길을 다시 올까. 엄마라는 매개가 있기 때문에 친정도 있는 것이리라. 허공으로 퍼져가는 풍경 소리, 그 파문 속에 엄마의 얼굴이 가득 퍼진다. 늘 잔잔한 그리움으로 내 가슴에 사는 엄마.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하늘처럼 말없이 떠 있는 엄마. 엄마를 볼 수 있는 북적거리는 설날이 있어서 참 좋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안기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이렇듯 자식에 관한 속담이 많은 것은 그만큼 부모에게 자식은 의미심장한 존재라는 것 아닐까. 군대 간 아들이 핸드폰을 보내 달라고 공중전화를 걸어왔다. 이젠 군에서도 핸드폰을 쓸 수 있다고. 주말에 면회를 하러 갈 계획이니 토요일에 갖다주겠다고 하자 택배로 보내 달란다. 전화기가 들어오면 내부에서 검사작업을 마친 후 본인에게 주기 때문에 우체국 택배로 받는 것이 가장 좋다고. 다음날 나는 전화기를 들고 출근했다. 오후에 잠시 외출을 쓸 요량이었다. 아침 돌봄 선생님에게 무심코 그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그녀가 본인이 퇴근하면서 보내주겠다고 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폰을 넘겼다. 다음날 그녀가 우체국 영수증을 줬다. 화요일에 보냈으니, 금요일이나 늦어도 토요일에는 들어간다는 말과 함께. 토요일, 면회를 하러 갔다. 그런데 전화기가 아직 도착을 안 했다고 한다. 혹시 주소를 잘못 적은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런데 수요일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보낸 지 열흘이 지난 금요일 아침, 걱정되어 아침 돌봄 선생님에게 말하자, 도와주려 한 것이 폐가 된 것 같다고 미안해한다. 보낸 우체국이 어딘지 물어서 전화했다. 담당 집배원의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집배원에게 전화하자 받는 사람 주소가 어떻게 되냐고 묻는다. 공군 비행단이라고 하자 자기 담당이 아니라면서 다른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다시 전화하니 사서함 우체국이라고 한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택배는 도착해 있다고 한다. 그럼 왜 배달을 안 하냐고 물으니 사서함 우체국은 배달하는 곳이 아니라 보관만 하는 곳이라 한다. 그럼 언제 배달이 되냐고 하자 부대에서 가져가야 한단다. 그게 언제냐고 묻자 모른다고 한다. 그곳이 어디냐고 하자 부대 내에 있는 사서함 우체국이라고 한다. 그제 서야 모든 의문이 녹아내렸다. 저녁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을 받긴 했는데 군 정지 해지가 안 되어 슬프단다. 해지하려면 6시 전에 해야 하는데, 군인의 일과는 6시에 끝나서 통신사에 전화할 방법이 없단다. 다음날 통신사로 전화를 해서 직원에게 사연을 털어놓았다. 직원은 아들의 생년월일을 물었다. 주민등록증을 찍어 놓은 것이 있어서 그것쯤은 쉽게 대답을 했다. 이번에는 요금이 어디서 빠졌냐고 물었다. 농협 통장일 거라고 했더니 아니란다. 농협 카드에서 빠졌었다며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묻는단다. 주소를 대라고 한다. 난 자신 있게 우리 집 주소를 댔다. 그러나 이번에도 틀렸다고 한다. 충주로 되어 있단다. 아마 자취하던 곳의 주소를 입력한 것 같다고 하자 그 주소를 대라고 한다. 결국 전화기를 풀지 못했다. 순간, 아들이 살던 자취방 계약서를 핸드폰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것이 있었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핸드폰을 뒤졌다. 없었다. 내 전화기를 얼마 전 바꾸었기 때문에 집에 있는 전화기에 있을 것 같았다.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서랍을 여니 낡아서 쓰지 않는 핸드폰 네 개가 취침 중이었다. 그중 최신 제품인 것 같은 것 두 개를 골랐다. 기계를 켜니 켜지지 않았다. 방전된 것이다. 6시까지는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두 개의 핸드폰을 다 충전케이블에 연결했다. 십 분 후 하나의 핸드폰을 켰다. 그러나 비번이 생각나질 않았다. 이것저것 넣어 간신히 화면을 풀었다. 갤러리를 아무리 뒤져도 없었다. 5분이 남았다. 다른 핸드폰을 켰다. 갤러리를 뒤지자 그곳에 계약서가 있고 주소가 있었다. 2분이 남았다. 전화를 걸고 간신히 상담원과 연결이 되고 군 정지를 풀었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들이 이제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똑같을 것이다. 자식이 좀 더 편안하게 생활하기를, 험하지 않은 길로 가기를. 세상의 모든 자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땅을 포근하게 덮어줄 눈이 내린다. 새하얀 눈송이를 보며 새해에는 따듯한 일만 펑펑 쏟아지길 빌어본다.
싸늘한 아침,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본다. 까치 한 마리가 208동과 209동 사이 허공을 그으며 날아가고 동남지구가 흐릿한 시야에 잡힌다. 산의 붉은 속살이 파헤쳐지던 때가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어느새 아파트가 여기저기 몸을 만들어 가고 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 황달 걸린 사람의 눈 같은 표지를 입고 있다. "미세먼지를 많이 쐬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군요."라는 앵커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미세먼지 탓일까. 갑자기 슬픔이 뿌옇게 몰려든다. 아침이면 일어나 습관처럼 출근하고 저녁이면 아무렇지 않은 듯 집으로 돌아오는 나. 나는 누구인가. 랭보는'나는 타자'라고 했다.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인 랭보.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에서 보여주었던 프랑스의 뒷골목과는 다른 빛깔의 프랑스와 유럽을 보여주었던 랭보. 그는 철저히 시대의 반항아였으며 방랑자였으며 광기에 휩싸인 시인이었다. 목차를 훑어본다. 매혹적인 제목들(나쁜 피, 지옥에서 보낸 한철, 취한 배)이 나를 당긴다. 책장을 넘기며 랭보의 거침없던 삶을 본다. 제국주의가 난무하던 시대, 백인들의 횡포와 당시의 사회상을 담은 시들은 소외된 자의 아픔을 육화해서 그려냈다. 시대를 조롱하는 듯한 어린 시인의 모습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짧지만 강렬하게 살다간 그의 삶의 여정을 읽으며 시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되돌아본다. 여덟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방황의 나날을 보내며 가출을 거듭했던 천재 랭보. 1854년에 태어나 1891년 생을 마감한 시인. 상투적인 삶이 아니라 새로움을 추구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랭보. 베를렌과의 동성연애를 하며 마약과 술 등 방탕한 생활을 했던 랭보. 그리고 온갖 곳(네델란드, 인도네시아. 북아프리카. 영국, 벨기에)에 발을 디디며 살았던 랭보. 그의 삶은 그의 시 제목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을까. 신선한 충격을 준 그의 시들을 들여다본다. 글자를 색깔로 재해석하여 명명한 모음과 착란이라는 시가 내 눈을 머물게 한다. 모음이라는 시는 동성애의 대상인 시인 베를렌에게 보낸 편지에 있었다고 한다.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그 만의 시각이다. 감각의 착란이며 언어의 뒤틀림이며 견자의 시각이다. 1871년 당시 이런 획기적인 시를 쓰다니. 지금 보아도 파격적이다. 그리고 착란이라는 시에도 다시 한번 모음의 색깔이 나온다.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 언젠가는 너희들의 보이지 않는 탄생을 말하리라 (모음) 나는 모음들의 색깔을 발명했다! A는 검고, E는 하얗고, I는 붉고, O는 파랗고, U는 푸르다. 나는 각 자음의 형태와 운동을 조절했고, 그래서 본능적인 리듬으로, 언젠가는 온갖 감각에 전부 다다를 수 있는 시의 언어를 창조하리라 자부했다. (착란Ⅱ) 남들이 보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았고, 남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았던 랭보. 그의 시는 철저히 계산되고 조직화한 것이다. 모음이라는 시에서 알파와 오메가를 고려하여 A를 맨 앞에 그리고 O를 맨 끝에 넣어 처음과 끝을 상징했다. 즉 A,E,I.O,U 가 아니라 A,E,I,UO,로 계산된 배열을 한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인 지금에 보아도 촌스럽지 않고 현대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요즘 시인들이 랭보를 은근히 따라 하는 것이 아닐까.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나쁜 피'등 그의 시에서 나온 말들이 아닌가. 그의 거침없는 행보와 폭발적인 광기가 부럽다. 나는 누구인가. 왜 이 작은 지구별에서 머뭇거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목적도 없이 흐린 시간 속을 미세 먼지처럼 떠도는 나는 무슨 색깔일까. "시인이 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알아야 해"라는 랭보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는다.
인연과보를 알면 조급해질 이유가 없다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한 해를 돌아본다.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은 그 원인이 작용하는 조건이고 원인과 조건의 결합으로 과보(결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날 수도 있고 나중에 나타날 수도 있으니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로 지지면 즉시 뜨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하지는 6월이지만 기온이 가장 더운 때는 8월이다. 이렇게 모든 일에는 원인 있으면 결과가 있지만, 6월과 8월처럼 시차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편해하지 않아도 반드시 그 결과는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이다. 불완전하기에 완전을 추구하며 하루하루 흔들리며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를 놓고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긴장을 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그에 걸맞은 결과를 얻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더라도 좋지 않을 경우는 적잖은 실망감을 느낀다. 어떤 때는 자괴감에 홀로 몸을 뒤척이며 어둠을 말리기도 한다. 이는 내가 인연과보를 간과했기 때문이리라. 꼭 원인과 결과가 눈에 보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어리석은 중생이기 때문이리라. 인연과보의 시차를 알았더라면 좀 더 여유 있는 맘을 가질 수 있었까. 아득한 절망이 고요처럼 깔린 한 밤에 깨어 어깨를 들썩이는 일이 없었을까. 몇 년간 써온 원고를 정리해서 출판사에 보냈다. 한편으로는 후련하면서 한편으로는 풍랑 속을 떠도는 돛단배가 된 기분이다. 오랜 시간 공들인 글자들이 내 손에서 멀어지고 난 후, 오히려 불안감이 몰려드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는 시집보낸 딸이 잘 살길 바라는 부모 마음과 같을 것이다. 출판사의 기획 의도와 잘 맞을지, 디자인은 잘 나올지, 또 출판해 놓고 나서 반응은 어떨지, 모든 것이 걱정이다. 이왕이면 좋은 출판사에 깔끔한 디자인으로 출판하고 싶은 욕심, 이왕이면 좋은 평을 받았으면 하는 욕심들이 머릿속에 치어처럼 바글거린다. '자유로워지고자 한다면 욕망을 누를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떠올려 본다. 일렁이는 내 마음속의 물결을 가만히 쳐다본다. 나는 얼마나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내려놓고 자유로워지자고 나를 다독인다. 그러나 바람에 나뭇잎이 뒤집히고 바로 서기를 반복하듯 마음속이 펄럭인다. 애써 살지 않기로 해 놓고도 난 그것을 또 잊어버렸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내 글들은 나의 손을 떠났다. 어디에서 출판이 되든 독자들의 반응이 어떻든 그것은 그들의 몫이 아닌가. 난 원인을 제공했고 출판사에서는 그 원인이 작용하는 조건에 맞추어 책을 만들어 줄 것이고 원인과 조건의 결합으로 결과가 나올 것이리니. 잘못된 문장을 고치면 되지만 쓰지 않은 문장을 고칠 수 없다는 말을 새기며 하루하루 나의 길을 가면 그만인 것을. 봄에 씨를 뿌려 뜨거운 여름을 지나 가을에 열매가 익듯이 그렇게 삶도 익어 가리라. 어떤 열매가 오든 그것은 본인의 책임이리라. 어떤 여름을 보냈느냐에 따라 열매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지리라. 최선의 원인과 조건을 결합하게 했다면 그 결과는 언젠가는 나타나리니. 그 열매가 당장 익지 않더라도 원인 행위를 했다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결과에 자족하면 그뿐인 것을. 바람이 몇 개 남지 않는 나뭇잎을 세차게 후려치고 있다. 애써 가지를 붙들고 온몸을 떨던 나뭇잎이 스스로 손을 놓고 허공으로 난다. 가볍게 유영하는 나뭇잎이 한없이 자유로워 보인다. 행복 하고자 한다면 욕망의 양을 줄이라 했던가. 올겨울 자유롭게 날고 싶다. 한마터면 너무 애쓰며 살 뻔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역설이라 했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연과 혼돈의 연속이라 했던가. 뫼비우스 띠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의 프랙탈 속을 헤매는 것이 인생 아닐까. 그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살은 딱딱하고 온통 순백이다. 시 모임인데 지금은 6시다. 시간의 여유는 주변을 둘러 볼 마음의 여유를 준다. 그의 온몸을 샅샅이 눈으로 더듬는다. 옆구리에는 온풍기가 한숨같은 바람을 토해내고 있다. 명치에 걸린 시계는 다섯시 이십분에 멈춰있다. 늑골에는 마틸다 메이와 제라르드 다몽이 청춘으로 갇혀 나를 보고 있다. 우연히 카페에서 마주친 영화 포스터에서 마틸다 메이를 본다. 그녀의 눈동자는 2시 방향으로 새침하게 가 있고, 굳게 다문 입술은 도도해 보인다. 작은 귀걸이가 귓불에 반짝이고, 링 모양의 펜던트가 목에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다. 검은색 재킷을 걸치고 있는 그녀 뒤로 황혼이 황사처럼 몰려들고 있다. 빛이 시들해져가는 11월 저녁, 루멘이라는 카페 불빛으로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될 줄이야. 그녀가 나왔던 영화 달과 꼭지를 생각하며 손을 커피잔 쪽으로 뻗었다. 그녀의 기에 눌린 탓일까. 잔을 쥔다는 게 잔을 눕히고 말았다. 갈색 액체가 테이블 위로 흘러넘치더니 이내 바닥으로 낙하한다. 고요가 몸을 불리던 곳에 돌연 찾아온 소란에도 그녀는 여전히 도도한 표정으로 당황하는 나를 보고 있다. 영화 속, 빨간 셔츠를 입고 인간 탑을 쌓던 사람들. 그들이 와르르 무너져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퍼뜩 뇌리를 스친다. 하늘 높이 쌓아 올린 인간 탑이 쏟아져 내릴 때의 긴장감과 정상을 눈앞에 둔 소년의 두려움에 젖은 눈빛이 생생히 살아난다. 1996년에 개봉되었던 스페인 영화 달과 꼭지. 떼떼는 남동생의 탄생으로 인해 가족들의 관심 순위에서 밀려난다. 소외된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방황을 시작한다. 엄마 품은 이미 동생의 것이고 모두 동생에게만 시선을 집중한다. 자신도 아직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인데, 갑작스레 변화된 주변의 상황에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소년은 달을 보며 기도한다. 자신만의 가슴을 찾게 해달라고. 즉 자신이 의지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를 찾는 것이리라. 그리고 어느 날 에스트렐리타 역을 맡은 마틸다 메이를 보게 되어 그녀를 따른다. 그녀는 눈물을 좋아해서 작은 병에 눈물을 모은다. 눈물을 모으다니 참 독특한 발상이다. 그녀의 남편은 모리스라는 프랑스인으로 설정된다. 카바파크 쇼에서 방귀 쇼를 하는 인물로 제라르드 다몽이 연기한다. 그녀는 남편의 방귀와 발 냄새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녀를 연모하는 또 다른 청년 미겔이 등장한다. 한 여인을 두고 벌이는 세 남자의 미묘한 감정들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미겔의 눈물에 감동한 그녀는 미겔과 사랑을 나눈다. 그런 관계를 알게 된 남편도 결국 그들을 용인한다. 지극히 동양적인 사고를 하는 내 정서로는 참 이해하긴 힘든 부분이었다. 결국 셋은 같은 공연팀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슈투트가르트의 여왕 에스트렐리타, 방귀 맨 모리스, 전기가 일어나는 천사의 목소리 미겔! 환상의 트리오에 박수를!"이라는 멘트와 함께 셋의 공연이 이루어지며 화합하는 해피앤딩의 영화다. 어찌 보면 떼떼의 성장 영화로 아이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세상을 그린 영화다. 자칫 저속하게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을 순수한 시각으로 그려내어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눈물을 사랑하던 그녀가 내 앞에서 도도한 눈빛을 흘리고 있다. 그 빛에 찔려 잠시 손이 떨렸다. 이런 곳에서 그녀와 마주치다니. 쏟아진 커피를 닦고 우연과 빛 그리고 시간과 영화에 대한 상념에 젖어있는데 책읽기 모임의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얼른 상념을 주워 담으며 책을 폈다. 인생은 어쩌면 아이러니한 영화 같은, 우연의 심연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오늘, 우연 속에 만난 그녀가 불빛처럼 나를 당긴다.
"삐악삐악 병아리, 음매음매 송아지. 따당따당 사냥꾼. 뒤뚱뒤뚱 물오리~ " 흥겹게 노래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손을 번쩍 든다. 평소에도 질문이 많은 아이다. 질문들이 다채롭고 독특해서 아이에게 귀를 열어놓는 일은 내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를 오빠와 형으로 부른다. 발달 지체가 있는 아이는 일 년을 유예했다. 한 살이 많지만, 보통의 아이들하고 다른 사고를 하므로 가끔은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oo가 참 좋은 생각을 했다며 일부러 칭찬해 주곤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갑자기 손을 치켜든 것이다. 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내게 던지면 입을 연다. "선생님, 사냥꾼도 동물인가요·" 작은 동물원이라는 노래를 배우고 있었으니, 노래 안에 등장한 사냥꾼이 동물인지 아닌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응 사냥꾼도 동물이에요. 사냥꾼은 사람이니까요. 사람은 동물의 분류에 속해요. 그런데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조금 달라요. 왜냐하면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거든요."라고 말해놓고 나는 잠시 멈칫했다. '사람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것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라고· 그럼 다른 동물은 생각을 못 한다는 말인가· 그건 너무나 인간적인 발상이 아닐까·' 동물은 인간의 삶 속에 뗄 수 없는 존재다. BC8,000년 전에 농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동물들을 가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물들을 필요에 의해 도축도 하고 농경 생활의 도구로도 이용했다. 그들을 사육하면서 인간은 그들에게 우월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들을 인간 중심적 사고에 의해 야생동물(wild animal) 그리고 가축화된 동물(domestic animal) 그리고 애완동물(반려동물, pet)로 나누었다. 2,000년대 현재 지구상의 육상동물 중 인간과 가축, 그리고 애완동물들이 97%이고, 야생동물은 3%만이 존재한다. 농업혁명을 시작한 신석기시대만 하더라도 이 비율은 반대였다. 2019년 현재 77억이라는 인구와 250억 마리의 가축화된 동물과 애완(반려)동물들과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라기 보다 거느리고 산다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동물들과 평화로운 공존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야 가능한 것이다. 다른 동물도 생각을 할 것이다. 단지 사고하는 방식이나 크기와 깊이가 다를 뿐. 나는 개 두 마리와 돼지 한 마리 그리고 닭 다섯 마리와 산다. 새벽 다섯 시쯤 되면 닭장에서 꼬꼬들이 먼저 울음으로 아침을 깨우고, 여섯 시가 되면 돼지 꾸꾸가 기다란 입으로 내 온몸을 꾹꾹 누르며 깨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7시가 되면 개인 영이와 철이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와 몸을 치대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알람들이다. 출근할 때는 그들에게 AI 스피커를 이용해 이루마 음악을 반복재생 시켜주고 집을 나선다. 신발을 신고 그들의 머리를 하나씩 쓰다듬어 주면서 작별 인사를 할라치면 그 슬픈 눈빛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몇 번을 "잘 지내~ 집 잘 봐!"라는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선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면 영이와 철이가 달려오고 뒤를 이어 꾸꾸가 나를 마중한다. 그리고 내가 책을 보면 꾸꾸는 무릎에 올라와 앉는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아 내 무릎을 차지하지 못한 영이와 철이는 옆에 앉아 나를 지킨다. 심지어는 닭까지도 내가 마당에서 풀을 뽑을 때면 내 몸에 자신의 몸을 기댄다. 그런 그들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동물들과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 가지치기해 온 인간중심주의 적인 사고가 나를 놀라게 한다. 인간만이 생각한다는 생각은 인간들의 오만한 프로노이아※ 아닐까. 모든 피조물은 개개의 특성이 있으며 다 소중한 것이다. 오만함을 버리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 우주와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비밀리에 결탁하고 있다는 믿음
난 나를 믿지 않는다. 나를 믿어서 얻은 낭패감이 그동안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믿지 않기로 했다.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지. 내 뇌는 편집을 통해 기억하고 싶은 일만 확대재생산하고 그것을 그대로 믿기도 한다. 때로는 사람들과 사물들과 장소들을 이해라는 단어를 통해 오해하고 산다. 오늘 주말농장의 침대 시트를 빨려고 꺼내다가 나는 반가움에 소스라쳤다. 거기 있었다. 꿈에도 생각을 못 했었는데 침대 시트 위도 아닌 시트 아래에 그것이 왜 들어가 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던 여름날이 훅 떠올랐다. 석 달 전 직무 연수가 있던 날이었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충북스포츠센터로 향했다. 날씨는 더웠고 에어컨은 고장 나 있었다. 연신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풀고 갔던 머리카락을 묶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풀면 덥고 묶으면 머리가 아팠다. 드디어 점심시간, 밥을 함께 먹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장도 볼 겸 육거리 시장을 향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가 정겨웠다. 간단히 꼬마 김밥과 어묵으로 허기를 달래고 장을 보기 시작했다. 반찬가게에 들어서니 각종 반찬이 눈길을 끌었다. 오징어 젓갈을 사자 깻잎을 덤으로 주었다. 만 원 이상을 사면 주차권도 주었다. 상인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일반 쇼핑몰 못지않은 시설과 물건에, 육거리 행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흐뭇해했다. 점심 후 다시 연수 장소로 갔다. 오후 내내 찜통이었다. 에어컨은 a/s 신청을 했으나 수리 기사들이 다 예약이 되어 있어 당일 방문은 어렵다고 했다. 폭염에 29명이 지하의 꽉 막힌 공간에서 헉헉거리며 연수를 들었다. 나는 또 머리를 질끈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귓불을 몇 번 스쳤던 것 같다. 연수를 마치고 귀가하는 차 안에서 무심코 백미러를 봤다. 사라졌다. 오른쪽 귓불에 있었던 나비 귀걸이 한 짝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또 다른 꽃을 찾아 떠난 걸까.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을까. 향도 색도 없는 어정쩡한 내가 못마땅했던 걸까. 우리는 십 년을 함께 지냈었다. 둥근 고리 아래 나비가 붙어 있는 것이라, 고리만 채워두면 여간해서는 귀에서 빠지지 않았다. 잠잘 때도 목욕을 할 때도 늘 끼고 살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 몸처럼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침에 한 번 거울에서 마주치면 반짝이는 그녀의 미소에 나도 눈길로 회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녀와 내가 인사를 했었던가. 그녀가 노란 날개를 펄럭이며 내게 소리 없는 소리로 안부를 물었던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를 샅샅이 뒤졌다. 흔적도 없었다. 나의 동선을 곰곰 생각했다. 부엌으로 갔다.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찬찬히 훑어봤다. 깨끗했다. 화장실로 거실로 나비를 찾아다녔지만,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연수 강사에게 전화를 했다. 몸으로 하는 연수였으니 준비체조나 마무리 체조 혹은 동작 연수 과정에서 그곳에 떨어졌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수 받던 곳에 떨어져 있을 수도 있으니 수강생들에게 단체 카톡을 넣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소식은 오지 않았다. 다시 머리를 쥐어짰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떨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이 오가는 시장에서 떨어졌다면 찾기는 글렀다고 맘을 먹었지만,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수많은 날들이 어제로 흘렀다. 오늘 나비가 다시 내게로 왔다.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나에 대한 믿음이 한 걸음 더 멀어졌다. 매사에 호언장담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사건들과 사물들을 오해할 수 있는 일인지. 뇌의 가소성을 생각해 보며 모든 일에 판단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날이다.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라고 했던가. 들깨 단처럼 바짝 마른 손에 맥박 줄을 달고 돌이 되어 누워 있던 영이. 입에는 산소 줄을 끼고 초점 없는 눈은 병원의 하얀 벽을 미동도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영이 편히 보내주세요."라는 나의 말이 떨어지자 의사는 안락사용 주사액을 주입했다. 검게 늘어진 한밤중에 나는 우주가 깨지는 것을 보았다. 그날 영이는 몸에 힘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친정에 다녀온 나를 현관까지 나와 반겨주었다. 그런데 저녁나절부터 영이가 수상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꺼풀이 자꾸 아래로 쏠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유선종양이 있어서 치료를 받고 다녔지만 그렇게 갑자기 숨을 놓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영이가 이상하다고 말하자 아들은 영이를 데리고 병원에 간다고 했다. 저녁 11시가 넘었고 추석 연휴라 다니던 병원이 문을 닫았다. 아들은 검색을 통해 24시간 진료하는 병원을 알아냈고 영이는 힘없이 걸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울면서 전화를 해 왔다. 영이가 위독하다고. 피검사를 했고 폐 검사를 했고 호흡이 안 좋아 호스를 끼고 산소 방에 들어가 있는 중이라고. 새벽 두 시였다. 나는 옷을 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영이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 떠다니는 병원의 딱딱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에 손을 얹어도,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도 얼음이 되어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순간 13년의 세월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통곡하는 아들의 슬픔 냄새가 병원 안을 빽빽하게 채웠다. 영이의 눈을 감겨주고 항문과 입을 솜으로 막고 상자에 넣어 집으로 왔다. 단단한 몸을 꺼내 방에 누이고 밤 새 온몸을 쓸어 주었다. 내 눈에 뿌연 물방울이 고이고 목 안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손 빗장으로 눌렀다. 식탁에는 아침에 주기 위해 불려 놓은 사료가 말캉하게 퍼져있었다. 영이는 이가 안 좋아 사료를 말랑하게 만들어 주었었다. 젤리 간식도 옆에서 분홍색 빛을 흘리고 있었다. 일어나 주섬주섬 영이의 물건을 챙겼다. 털이 붙어 있는 빨간 후드 티와 파란 줄무늬 티, 점 모양이 찍힌 보라색 티. 토끼 그림이 그려진 티, 덮던 이불, 분홍색 목줄, 영이가 좋아하던 뼈다귀 모양 장난감, 그리고 내 전화번호가 새겨진 영이의 목걸이 등 영이의 흔적이 집안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목련 아래 수목장 하기로 했다. 마당 그네 옆에 해마다 하얀 꽃을 터뜨리는 목련이 말없이 서 있었다. 땅을 열고 차갑게 식은 영이를 그 옆에 놓았다. 철이를 불러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철이는 영이가 저승으로 편입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이에게로 와 온몸의 털을 핥으며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영이를 이불에 싸서 씨앗처럼 땅에 심었다. 그 옆에 장난감과 옷과 사료와 간식 그리고 동전 몇 개를 같이 넣어 주었다. 구덩이에 놓인 이불을 다독거리고 있는데, 그 위로 철이가 들어가 턱 하니 앉아 있었다. 뾰족한 귀를 세우며 동그란 눈망울엔 원망이 맺힌 빛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구덩이에 손을 뻗어 철이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영이의 몸 위로 흙을 한 삽 떠 넣고 슬픔도 같이 묻기로 했다. 철이의 낑낑거리는 울음소리가 마당을 적셨다. 그리고 며칠 철이는 밥을 먹지 않았다. 일주일째 우리 집 마당에는 소리 없는 울음이 흐르고 있었다. 영이를 품은 흙을 손으로 만져봤다. 영이의 숨소리가 쿵덕쿵덕 들리는 듯했다. 내년 봄, 영이는 하얀 꽃으로 피어나겠지. 철이도 그때쯤에는 영이를 잊고 잘 지내길.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봉분 위로 내려앉았다.
머무는 것은 잠시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던가. 그녀를 천안 터미널에 내려 줬다. 인파 속에 섞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가슴이 둔탁한 무엇인가로 짓눌려 으깨지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을 토했다. "이제 다시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네요. 교장 선생님도 안 계시니. 선생님 건강하게 잘 살아요."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내 눈 속에 물이 차올랐다. 그녀와 나는 만리포에서 처음 만났다. 25년 만에 복직한 그녀와 신규 발령 난 나는 삼 년 동안 시골 관사에서 함께 살았다. 첫 발령 당시 내 나이 삼십 중반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으니 난 신규가 아니라 그야말로 쉰규였다. 25년 만에 복직을 한 그녀나 뒤늦게 신규로 발령이 난 나나 업무가 서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건 나는 컴퓨터를 그녀보다 조금 더 잘 다루었고, 그녀는 학부모와 직원들 간에 소통법을 나보다 더 잘 알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보완해 가면서 낯선 타지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그런 우리가 안쓰러웠던지 당시 교감 선생님은 둘을 불러 닭백숙도 사주시고 오리 훈제도 사주시면서 격려를 해 주셨다. 업무적으로 부족한 점도 조목조목 알려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이연의 끈으로 묶였다. 그 후 난 가족이 있는 청주로 왔고 그녀는 서울로 갔다. 그리고 교감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이 되어 천안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천안에서 만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며 웃곤 했었다. 천방지축이었던 나와 어눌했던 그녀 때문에 교감 선생님은 늘 마음이 쓰였다고 했다. 지난해 겨울 천안에서 마주 앉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코스모스 위로 고추잠자리 소리 없이 내려앉은 날, 부음이 날아들었다. 서예대전에서 상을 받았다고 소식을 준 것이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검은 옷을 입은 그녀가 나를 보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눈에 핏발이 가득한 그녀를 안아주고 영정 앞에 꽃 한 송이를 올렸다. 하얀 국화에 둘러싸인 사진 속 그가 맑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국밥을 말고 있는데 고인의 동생이라며 여인이 다가왔다. 느닷없는 날이었다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어느 구석에 꼬꾸라졌다고. 교장 선생님은 평소에 건강에 무척 신경 썼다고 했다. 그래서 늘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했다고. 사고 직후 교장 선생님이 직접 119에 신고를 하고, 뼈 접합술도 무사히 마쳤단다. 그런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진다고 소리를 질러 응급실로 옮기던 중 맥을 놓았다고 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화가 나고 한편으로 생각하면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감 선생님은 다리를 절었다. 내가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는 이미 그렇게 된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원인도 없이 전신이 마비되었다고 했다. 죽고 싶어도 일어날 힘이 없어서 죽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재활을 통해서 마비되었던 몸이 회복되고 다리만 절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몸으로 교장까지 승진했으니 그야말로 인간승리인 셈이다. 상가를 나와 터미널로 가는 길, 그녀가 깔끔하게 죽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하자 교장 선생님이 한 살 많으니 자기도 준비를 해야 할 나이라고 했다. 가족들 마음고생 몸 고생 안 시키고 본인도 고생 안 하고 갈무리하고 싶다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죽음은 나이순이 아니지 않는냐고. 아직 더 사셔야 한다고. 그녀의 뒷모습이 인파 속에 섞여 가뭇없다. 오래오래 편안히 지내시길.
"자신과 교감하는 법은 사막을 홀로 헤맨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냐!" 영화의 대사를 듣는 순간 가슴을 예리한 송곳으로 찔리는 것 같았다. 내성적이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다. 혼자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혼밥도 잘 먹는다. 그런다고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허리케인처럼 나를 강타한다. 그럴 것이다. 홀로 내가 찾아진다면 나는 골백번도 나를 찾아 교감을 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 있는 시간도 물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 교감하며 나를 찾아가는 법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리라. 북클럽이라는 영화를 봤다. 60대 소녀(?)들이 새로 쓰는 인생이야기다. 60대라고 하면 누구나 인생을 정리할 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새로운 삶에 두근거리고 있다. 그녀들은 40년 동안 우정을 쌓아온 독서 모임 친구다. 그녀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았을 때 성공한 삶은 아니었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잊고 살았던 내면의 욕구와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사회적인 바람이 아니라, 개인적인 바람을 갖고 삶을 바라본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두근거리는 삶을 시작하려 노력한다. 어떤 것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나이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숫자가 아니라, 설렘이 남아 있느냐 없느냐일 것이다. 호기심 많고 겁도 많은 소녀 감성인 다이앤은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산다. 호텔을 운영하며 성공한 삶을 사는 비비안은 연애만 하는 미혼이다. 연방법원 판사인 섀론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남편과 이혼하고 고양이와 산다. 캐롤은 레스토랑 운영과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 두 가지 목표 모두 이뤘지만, 남편과 부부생활을 오랫동안 하지 않은 속사정이 있다. 이런 60대 소녀 4인방이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렸다. 영화의 전반적으로 흐르는 메시지는 '누구의 눈치를 보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삶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이다. 육체가 늙었다고 마음도 늙는 것은 아니리라. 육체 나이가 몇 살이건 누구나 소녀로 살 수 있다. 누구나 마음속엔 초록이 무성할 테니까. 내 인생을 가만히 뒤돌아본다. 과연 나는 내 마음의 물결이 흐르는 대로 살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그렇다. 그러나 가끔은 아니다"이다. 사회적인 대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았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홀로 사막을 헤맨 것은 아닐까. 나만의 사막에 고립되어 산 것은 아닐까. 자신과 교감하는 법은 사막을 홀로 헤맨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사막을 헤매도 누군가와 함께 헤맨다면 덜 외롭고 쓸쓸하지 않을까. 인생의 황혼에서 과연 내 곁에 남아줄 친구는 누구일까. 나도 그녀들처럼 독서 토론 모임을 몇 개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단지 내 지식을 확장하는 조력자로 생각했지 친구로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 그들에게 진심을 담은 눈빛을 보낸 기억이 없다. 한 달에 한 번 만나 생각을 열어 보이며 토론하고 내 생각의 주름을 깊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 정도로만 여겨왔다. 그 시간을 돌아보니 후회가 저녁 그림자처럼 길어진다. 훗날 누가 내 곁에 남아줄까를 고민하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곁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맞는 생각이 아닐까. 이제 사막을 헤매도 누군가의 옷자락을 잡고 헤매리라. 고비에서 만났던 까끌까끌한 모래가 서걱이며 명치에 쌓이는 듯 하다.
아침부터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전화였다. 출근 준비에 바쁜 나는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차를 빼다 긁었어요. 내려오셔서 확인 좀 해 주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안에서 나풀거렸다. 화장을 하다 말고 립스틱을 내려놓고 슬리퍼를 끌고 지하 2층 주차장으로 향했다. 앞 범퍼가 긁히고 검은 타이어가 잔뜩 묻어있다. 여자는 나를 보고 보험회사에 연락해보라고 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제가요? 왜요? 그쪽에서 그쪽 보험사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얼굴을 붉혔다. 여자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듯 "그런가요? "하더니 전화 버튼을 눌렀다. 일단 사고 부위의 사진을 찍고, 혹시 몰라서 내가 가입한 보험사에 연락했다. 사고 접수를 해야 하냐고 묻자 보험사에서는 상대의 과실이 100%라 사고 접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상대가 과실을 인정하면 그냥 그대로 수리를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지만 혹시 모르니 현장 사진은 찍어 놓으란다. 여자의 보험회사로부터 사고 접수 번호를 받고 출근을 서둘렀다. 수업 후 조퇴를 달고 보험회사에서 지정해 준 공업사로 갔다. 범퍼를 갈아야 해서 이틀은 걸린다고 한다. 렌트를 해 줄 테니 그걸 타고 다니란다. 그런데 렌터카는 내 차와 종이 달랐다. 기계치인 나는 버벅버벅 낯선 차를 몰고 집으로 와 힘겹게 주차장에 세웠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생각지도 않았던 사고로 인해 오후 시간을 길에 송두리째 깔아버렸다. 살면서 뜻하지 않는 순간을 대면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새삼 느낀다. 며칠 전 학부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가 장애 유아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통합학급인 우리 반은 장애 유아와 일반 유아가 어울려 생활을 하고 있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교사가 함께 지도하고 있지만, 가끔 돌발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그녀는 본인의 아이가 장애 유아와 짝인 것도 손을 잡는 것도 싫다고 했다. 앞으로 더 큰 피해를 볼까 봐 걱정된다고 하며 짝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일단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이 서로 적응해 가는 과정이니 속상하겠지만, 이해를 해 달라고. 내 아이만 잘 키워서 되는 세상이 아니라고. 다 같이 잘 키워야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함께 하는 것이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일반 유아들도 장애 유아와 함께 생활하면서 배려하고 양보하고 나누는 그런 마음이 커 간다고. 그 아이도 부모님에게는 목숨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소중한 아이일 거라고. 원론적인 이야기인 것은 알지만, 때로는 원론적인 이야기가 가장 적합한 이야기일 때도 있다. 다행히 그녀도 좀 더 지켜보자는 데에 동의해 주었다. 오늘 사고를 겪으며 그 학부모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데 피해가 고스란히 내게 온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화나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을 대면하면서 생각이 자라고 판단력이 생기고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한다. 그럴 때 마다 밀어낸다면 세상은 너무 각박한 사막이 되지 않을까. 오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차가 긁히고 소중한 내 시간을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 때문에 길에 깔았다고 생각하니 괜히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여자의 입장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본다. 남의 차를 긁어놓고 얼마나 당황했을까. 분주한 아침 시간에 내 불쾌한 표정을 보며 얼마나 불편했을까. 괜스레 미안하다. 속상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고. 괜찮으니 너무 개의치 말고 얼른 출근하시라고 쿨하게 이야기해 주지 못한 아침 시간을 가만히 들춰본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인생은 짧고 후회는 많다.
삶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살을 에는 겨울인가 하면 꽃들이 노래하는 봄이다. 봄이 지루해 질 무렵 뜨거운 여름이 사람을 녹초로 만들고 그런 날을 버티다 보면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온다. 삶은 계절처럼 변한다. 행복한 날이 있는가 하면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고 그런 날을 견디다 보면 살만한 날도 온다. 우리는 시간의 프랙탈 속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은 그저 그런 날이다. 나는 그저 그런 날엔 영화를 본다. 라는 영화가 내 시간의 거미줄에 포획되었다. 삼촌과 테니스 경기를 보던 아만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엘비스는 건물을 떠났어!" 아만다가 울먹이며 말한다. Elvis는 1950년대와 60년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던 미국의 가수 겸 영화 배우 Elvis Presley를 말한다. Elvis가 공연을 끝내고 나올 때면 관객들이 노래를 더 듣고 싶다고 환호를 하며 공연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관객들을 진정시키고 모든 일정을 안전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 공연이 끝났으니 집에 가라는 뜻으로 "Please, young people, Elvis has left the building."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로 이는 속담처럼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즉 기다려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아만다는 엄마와 둘이 살던 일곱살 소녀다. 비록 엄마와 둘이 살았지만 남부러울 것 없이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파리의 한 공원에서 테러가 발생한다. 권총 테러로 인해 아만다는 영문도 모르고 엄마를 떠나보낸다. 아만다의 전부였던 엄마가 하루아침에 떠났다. 그리고 그녀가 홀로 남겨졌다. 그 순간의 막막함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우주가 통째로 깨지는 그런 느낌이리라. 그러나 아만다는 끝내 담담한 척 울지 않았다. 갈 곳 없는 그녀를 삼촌 다비드가 맡기로 했다. 다비드는 아직 사회에 자리 잡지 못한 청년으로, 이렇다 할 직업 없이 이 일 저 일을 전전했다. 민박집에 여행자들을 안내하는 일과 공원의 나무를 자르는 일등을 하며 암울한 미래를 살고 있다. 그런 그들의 불안정한 삶이 마음을 짠하게 흔든다. 아만다의 눈빛이 가슴을 적신다. 윔블던 테니스대회를 구경하며 그들이 응원하는 선수가 지자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엄마의 죽음에도 태연한 척 하던 그녀가 경기를 보며 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잡을 수 없는 경기를 보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으리라. "Elvis has left the building!"이라는 말을 하며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이 명치를 찌른다. 그런 그녀에게 다비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끝까지 믿고 기다리는 거야!"라고 한다. 잠시 후, 지고 있던 선수가 다시 선전하게 된다. 아만다의 얼굴에 희망의 웃음이 번진다. 작은 소녀가 홀로 아픔을 살아내는 성장 영화는 열린 결말로 그렇게 끝이 난다. 어쩌면 우리는 홀로 던져진 존재가 아닐까.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도록 책임지워진 존재가 아닐까. 힘든 만큼 그녀는 단단하게 영글어 가리라. 다비드의 말처럼 믿고 기다리면 짱하고 빛나는 날도 오리라. 마지막에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에서, 희망의 끈을 잡고 있는 그녀를 본다. 변화무쌍하여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날씨처럼 인생은 그렇게 어디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눈 뜨면서 두근거리는 것은 아닐까. 어제는 태풍 크로사가 빗줄기를 흩뿌리고 지나갔다. 그런데 오늘은 날이 후끈하다 못해 뜨겁다. 그러나 이 계절도 언젠가는 바짝 마르며 시들어 갈 것이다. 선선한 바람에 몸을 내 줄 날이 올 것이다. 삶은 돌고 도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시간처럼.
무더운 날씨를 피해 호이안의 투본강으로 향한다. 강어귀에 이르자 개미 떼처럼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바구니 배(퉁바이)를 타기 위해 줄을 선 것이다. 나도 슬쩍 그들 속에 발을 끼워 넣는다. 익숙한 한국 음악이 흘러나온다. 기도를 보는 듯 작고 검은 청년이 한국 노래에 맞춰 연신 몸을 뒤튼다. '오빠 한번 믿어봐~. 너만 바라보리라~. 평생토록 내가 안아줄 게~.' 청년의 목소리가 강의 수면위로 툭툭 떨어진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말로만 듣던 바구니 배가 내 앞에 멈췄다. 어릴 적 들판에서 나물을 캐 담던 소쿠리를 닮았다. 봄볕이 마당 가득 펼쳐지는 날이면 난 소쿠리를 허리에 끼고 찬칼을 들고 논둑으로 밭둑으로 흘러 다니곤 했다. 공 벌레처럼 몸을 들에 말아 넣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물을 소쿠리에 채웠다. 등위로 따듯한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고 간간이 찬 기운을 품은 바람이 귓불을 스치고 갔다. 한나절을 그렇게 나물을 캐고 나면 바구니 안에 티끌 반 나물 반이 찼다. 그것을 집에 갖고 가면 엄마는 티끌을 골라내고 나물을 분류했다. 망초순은 된장 고추장을 넣어 나물 반찬을 해 주셨고, 캐온 쑥으로는 쑥버무리와 쑥국을 끓여주시곤 했다. 둥그런 바구니 배에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다. 배에 타자 갑자기 휘청 바구니가 흔들린다. 얼른 자리에 앉는다. 오래전 이것을 타고 바닷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을 꾸려나갔던 배라고 한다. 지금은 관광객을 태우고 갖가지 묘기로 즐거움을 주고 있다. 까맣게 그을린 사공이 반가운 듯 눈빛을 보낸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면서 웃어준다. 사공이 나뭇잎으로 메뚜기 반지를 만들어서 손에 끼워준다. 사람의 기분은 사소한 것에 의해 좌우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담긴 물건들은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금방이라도 살아서 튀어 오를 것만 같은 반지를 보며 기분이 활짝 피어난다. 한참을 바구니 배를 타고 나가자 제법 강이 넓어진다. 그곳에서 노를 젓던 다른 청년은 바구니를 돌리며 묘기를 부린다. 우리들은 그 묘기에 손뼉을 치며, 넓적한 노에 달러를 붙여 청년에게 내민다. 돈을 받은 청년은 더 신이 나서 격렬하게 빙글빙글 돈다. 타국에서 만나는 우리나라의 노래와 춤과 말에 왠지 자랑스러움이 배어 나온다. 황진이, 시골 버스. 내 나이가 어때서, 샤방샤방, 앗 뜨거뜨거, 강남스타일 등 우리나라에 들어 본 적이 있는 노래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노래를 한꺼번에 귀에 넘치게 들어 본 것은 처음이다. 타국에서 만난 노래들이 더 친밀하게 다가온다. 종일 우리 가락이 귓가에서 스멀스멀 피어 올라온다. 우리 것을 즐겁게 불러주는 그들이 고맙다. 그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겸손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참을 그렇게 뱃놀이를 한 후 우리는 배를 탔던 곳으로 돌아온다. 되돌아온 바구니 배가 둥글게 돌면서 멈춘다. 바구니 배에서 일어서자 둥근 배가 또다시 휘청거린다. 이름 모를 태국인 남자의 손을 잡고 선착장에 오른다. 휘청거리는 엄마가 자꾸 머릿속으로 찾아온다. 팔순이 넘으신 엄마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매 걸음마다 휘청거리며 땅을 딛는다. 나를 위해 평생을 휘청거리며 살았을 엄마. 지난 여름 통영에 갔을 때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셨다. 동생과 나는 엄마를 양쪽에서 부축해 가며 케이블카를 타고 배를 타고 여름 속을 떠다녔다. 엄마는 이게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면서 너무 힘들다고 하셨다. 엄마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로 나물 반찬을 드신다. 소쿠리 가득 나물을 캐서 엄마에게 음식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 돌아가면 머위와 호박잎을 뜯어 소박한 밥상을 차려드리련다. 달콤 쌉소롬한 엄마의 향기가 머릿속을 맴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만약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간절함이 덜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내가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조회대 위의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을 때, 함께 근무하던 교장 선생님께서 내게 해 주셨던 말이 문득 스친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답니다. 왜냐하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그만두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기우제를 지내러 산으로 갈 때 가재도구를 챙기고 가축들도 데려간다고 하네요.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내려오지 않을 작정을 하고 떠나는 거니까요." 내 생에 가장 간절한 소망은 무엇인가. 생각할 여지도 없이 아이가 홀로 제 길을 걸어가는 일이다. 비단 나만의 소망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 모든 부모의 소망일 것이다. 오늘은 사원과 성당을 방문하는 날이다. 어떤 신이든 상관없다. 내 간절한 소망을 마음을 다해 빈다면 신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까. 내 소망을 들어만 준다면 난 내 영혼을 다 바쳐 기도할 각오가 되어있다. 아침을 먹고 비밀의 사원이라는 영응사(靈應寺, Linh Ung)를 향한다. 멀리서부터 해수 관음상이 눈에 들어온다. 기도할 준비를 마쳤다.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해수 관음상을 만난다. 그것은 패망한 자유 월남을 탈출하다 죽은 보트피플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무려 30층 빌딩의 높이에 버금가는 67m의 불상은 단아하고 온화한 미소로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불상 앞에서 손을 모은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침향 법당과 옥 법당에서도 침향불상과 옥불상에게 기도를 한다. 숲길을 따라가자 마야부인 상이 한쪽 팔을 들고 서 있다. 일 곱 발자국의 연꽃 족적 앞에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땅을 향한 어린 석가상이 서 있다. 나는 마야부인상 앞에서도 어린 석가상 앞에서도 기도를 한다. 점심을 먹고 호이안으로 가는 길. 오행산을 오른다. 돌계단을 올라 동굴로 들어서자 곳곳에 불상이 있다. 불상을 보며 또 손을 모은다. 조금 걷다 보니 천국 길과 지옥 길이 보인다. 내 생의 족적을 되짚어 본다. 아무래도 나는 천국은 못 갈 것 같아 지옥 길 관람을 선택한다. 천국 길은 오르막이지만 지옥 길은 내리막이다. 깎아지른 듯한 오르막은 내리막보다 훨씬 가파르고 힘들어 보인다. 그만큼 천국 가는 길은 어렵다는 뜻이 아닐까. 생을 살다 보면 선한 일 착한 일만 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내키는 대로 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듯하다. 나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구석이 많다. 그래서 내 마음 시키는 대로 나부끼던 날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내가 천국을 간다는 것은 자못 힘든 일 일터, 난 오늘 미리 지옥 길을 한발 한발 내디딘다. 지옥 길은 예상했던 대로 어렵지 않다. 내리막길이라 땀도 나지 않는다. 곳곳에 험악한 죄인들의 피 흘리는 상들을 보는 것만 제외한다면 제법 걸을 만하다. 소리 없이 고함을 치고 온몸으로 고통의 표정을 그리며 울부짖는 그들을 보며 남을 일 같지 않다. 지옥 길을 관람하고 올라오면서 손을 모은다. 이런 길은 내가 갈 테니 우리 아이는 천국 길로 가게 해달라고. 이제 아이가 사회에 나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졸업반이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에 발을 들이고 그곳을 홀로 걸어가야 할 나이다. 꽃길만을 바라지는 않는다. 때론 험한 산길도 있을 테고 때로는 잘 닦인 도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혼자의 힘으로 걸을 수 있었으면 한다. 넘어지면 스스로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힘을 주길 세상의 모든 신에게 빌어 본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디언들의 기우제처럼, 나도 마음속으로 기우제를 지내본다. 아이가 홀로 설 수 있는 그날까지 기도하고 또 하리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고 싶다.
벽이 있다. 어떤 사람은 벽을 넘고, 어떤 사람은 돌아서 다른 길을 가고 또 어떤 사람은 벽을 부순다고 했던가. 나는 과연 벽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누군가와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란 게 있고, 나도 내 나름대로 사고를 하는 독립적인 존재이니까. 책 읽기 모임에서 만난 어떤 이가 다짜고짜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 "나는 대답했다. "저는 양파에요." 그러자 그녀가 다시 묻는다. "까도 까도 또 뭔가가 있는 양파라는 말씀인가요·" 나는 답했다. "아니요 까도 까도 아무것도 없는 양파죠. 양파는 까면 깔수록 아무것도 없어요. 다 까고 나면 허공만 남지요. 저는 그런 양파입니다. 그래서 저는 알면 알수록 알아갈 게 없는 허무한 사람이지요." 그녀는 다행이라고 했다. 자신은 우파인데 내가 혹시 좌파이면 모임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정치는 모른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이 나라에 발붙이고 사는 한 최소한의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가 말할 때 마다 난 대답했다. 무관심도 관심중의 하나라고. 그런데 그녀는 나를 볼 때 마다 좌파라 했다. 난 그때마다 아무파도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자신도 모르게 좌파의 물이 들어 있는 사람이라고 물마시듯 말했다. 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좌파건 우파건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스스로의 철학을 갖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라고. 오늘은 그녀가 유명한 앵커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 앵커를 정권의 개라고 했다. 이 정권이 기울면 바로 감옥행이라고. 나는 그 앵커는 잘 모르지만 그의 목소리와 반듯한 외모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간 앵커의 보도에 대해 이야기 했다. 모두가 편파적인 보도였다고. 완전 쓰레기라고. 나는 설마 그랬겠냐며 일부러 그녀의 맘을 건드렸다. 간혹 그런 보도도 있지 않았겠냐고. 왜 그렇게 세상을 좌 아니면 우로 보냐고 했다. 왜 한 쪽 눈만 뜨고 세상을 보냐고. 양쪽 눈을 다 뜨고 세상을 보라고. 본인의 생각과 같지 않다고 그 사람이 틀리다고 말하는 건 유아적 발상 아니냐고. 이런 저런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아니냐고. 내가 정치에 관해 무지한건 맞는데 적어도 한 눈 뜨고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굴절된 시각으로 보니까 세상이 다 비뚤어진 것이라고. 그동안 눌러왔던 이야기를 다 퍼부었다. 그녀는 뾰족한 내 눈빛을 보며 calm down!이라고 했고, 나는 일그러지는 그녀의 미간을 보며 에포케(epoch)!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와 나 사이에 침묵이 간지처럼 삽입되었다. 문득 영화 아쇼몽을 떠올렸다. 똑같은 살인사건을 가지고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의 견해가 다 달랐다. 아내는 아내의 시각으로 사건을 봤고, 사무라이는 그의 시각으로 사건을 봤다. 그리고 도적은 도적의 시각이고, 심지어 그것을 목격한 나무꾼조차도 다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는 기억의 가변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 관점의 차이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생각과 사고로,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온 것이리라. 벽을 보았다. 사람의 벽에 막혀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생각을 한다. 벽을 넘을 길이 없을 것 같다. 그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리라. 난 돌아가기로 했다. 조용히 벽이 없는 길로 가리라. 그리고 판단을 유보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