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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시인·수필가

초봄의 아침은 방바닥의 따순 맛에 얼른 이부자리를 차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나무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여 마당으로 이끌려 나왔다.

모란을 들여다보니 잔가지 사이로 어느새 봄 햇살이 먼저 와 자리 잡았다. 가지를 쳐낸 줄기에선 여린 이파리들이 얼굴을 내밀며 속잎을 말없이 틔우더니,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린다. 모란은 마치 봄빛을 갈구한 듯 파란 하늘을 꽃잎으로 받치고있다.

모란이 이곳으로 실려 왔던 3년 전 일이 기억 난다. 친정아버지는 유난히 화초 가꾸는 일을 좋아하셨다. 자투리 땅만 있어도 꽃나무를 심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즐기셨다.

때론 붉은 작약을 화단에 심어놓고 치자꽃 하얀 미소를 띄우시곤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초록눈 뜨는 어린나무처럼 행복해보였다. 그런 아버지의 잔잔한 향기가 작은 뜰에 항상 그득했다.

아버지는 꽃나무나 채소를 심기 전에 반드시 흙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신다. 거름은 썩혀 두었다가 사용하는데, 맨손으로 주무르며 냄새를 맡다가 뿌려주는 모습이, 마치 거름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도 여전히 때묻은 소맷자락 걷어가며 잘 삭힌 거름을 뿌려주고, 싹이 돋는 날엔 봄볕을 등지고 잡풀을 뽑는다.

그러면서 내게 말 하신다. "나는 말여 땅 기운 때문인지 흙만 주무르면 마음이 편안하고 근심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 라고….

꽃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이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면서 그 일에 몰두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유별나게 좋아했던 모란을 커다란 고무통에 옮겨심었다. 나무는 튼실히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잎이 무성하게 자랐다. 그러나 4년이 되도록 이파리만 무성하지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원인이 부족한 햇빛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마음껏 햇빛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자며 봄빛이 훤한 우리 집 마당으로 옮겨 놓았다.

그 이듬해 봄, 모란은 보란 듯이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다. 입을 앙~ 다문 붉은 자줏빛 망울들이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그 동안 햇빛을 충분히 받고 싶었어요.' 라고….

그 뒤 며칠 지난 어느 날, 아름다운 붉은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마당 안이 온통 환~하게 밝았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야! ~ 꽃이 어느새 피었네? 꽃잎에 눈길을 모으고 자세히 들여다보라! 노란 꽃술의 모양과 향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의 이치와 조화로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 전 모란은 초록의 넓은 이파리로 가슴에 푸른 희망을 불어 넣어 주더니 지금은 꽃을 피워 눈을 호강시켜 주고 있다. '어찌 밤새 소리도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메말랐던 가지에서 저토록 예쁜 꽃을 피워내다니… 저 신비로운 빛깔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제일 먼저 꽃이 활짝 핀 소식을 아버지께 전했더니 성큼 한걸음에 오셨다. 꽃을 드디어 피워낸 모란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중얼이셨다. "망울만 겨우 맺고 떨어져 버릴 때마다 지난날 사업 실패로 꿈을 펴지 못한 내 모습 같았는데, 옮기기를 잘했다" 하시며 몇 번이고 줄기를 어루만져 주셨다.

다음 날 하늘에서 무슨 심통이 났는지 갑자기 소나기를 뿌려댔다. 비를 몰고온 먹구름 사이를 Œb고 번개가 내리쳤다. 조급하고도 우악스러운 굵은 빗줄기가 나뭇가지를 아프게 때리고, 막 피어난 꽃잎위로 사정없이 쏟아져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시던 아버지가 모란 나무에 우산을 받쳐 주신다. 내가 물었다.

"아버지 비를 맞아야 나무가 더 잘 자랄 텐데 왜 우산을 씌우세요?"

"비가 너무 세차서 꽃잎이 아플까봐 그러지, 모처럼 핀 꽃인데 꽃 이파리가 다 떨어져 버리면 어떻게 허냐?" 하신다.

한참을 기다려도 비가 그치지 않자 나무 곁에 받침대를 세우고 끈을 계단에 연결하여 우산을 대롱대롱 받쳐 놓았다. 받쳐놓은 우산 위로 빗방울이 '톡톡' 튕겨져 나가면서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는 그런 사소한 일에서 잔잔한 기쁨을 얻어내고 정성을 기울였으며, 꽃이 필 때마다 마음이 유난히 설레인다고 하셨다.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며, 편하게 늙으려면 자연과 함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꽃이 필 시기에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도 마다하고 그 자리를 지켰다. 언제나 생각을 거듭거듭 숙고하면서 발갛게 두근거리는 얼굴로 눈부신 건강을 얻어내신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꽃놀이를 떠났다. 친정 어머니는 모처럼 아버지와 함께하는 나들이가 설레인다며 갖가지 음식을 마련했다. 배추 겉절이, 홍어무침, 돼지고기 보쌈 등등… 동생 부부와 조카들도 자리를 함께 해서 더욱 흥을 돋구었다. 온 식구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빙~ 둘러 앉았다.

그런데 아버지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폰으로 계신 곳을 알아냈다. 폰을 통해 들리는 말씀은 날씨가 갑자기 싸늘해져 밖에 내놓고 온 고추 모종이 걱정되어 집으로 급히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고추는 가을에 빨갛게 주렁주렁 매달렸고 삭막한 도회지 사람들에게 유일한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때론 겨우내 창가의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화분을 침대 맡에 줄줄이 놓는 바람에 방바닥에서 주무시는 일이 다반사고 그 꽃을 들여다보다가 가끔 끼니를 놓치기도 하셨다.

또한 다 시들어버린 꽃나무를 주어다가 정성으로 보살펴 꽃을 피우는 날에는, 집안에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면서 무척 기뻐하셨다. 작은 식물 앞에서는 유별나게도 아기 대하 듯 다정다감했다.

내 어린시절 아버지 성격은 팽팽한 직선 현악기 줄처럼 강직하셨다. 젊어서 공무원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나에게는 엄하고 무서워서 따뜻한 품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했다.

새 봄이 다시 찾아왔다. 오늘처럼 모란이 여린 잎을 내미는 초봄에는 유난스럽게 손길이 바빠지는 친정아버지 생각이 간절하다.

지금은 먼나라 끝으로 세상을 하직하셨지만 어느 낯설은 하늘역에서 다시 만날수 있을까? 봄빛을 닮은 주름진 얼굴 기억너머 그 영혼이 내 기억속 바람으로 남았다. 해마다 모란은 다시 피고지겠지만 모란꽃이 다 져버린다고 내 기억속 생생한 그 모습 잊혀질까?

나는 따스한 새봄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아버지가 심어 놓고 떠나신 모란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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