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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충북 민속예술의 뿌리를 찾아서 - 충주민속놀이

뱃사람들 안녕과 장사 번성을 위해 축제를 열다

  • 웹출고시간2011.11.13 17:59:0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충주민속놀이

△목계별신제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남한강변에서 목계별신제 목계줄다리기가 열리고 있다. 해마다 수천명이 참여하면서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목계줄다리기는 지름이 1.5m, 무게가 5t에 달하는 대형 줄을 당기는 목계별신제 대표 대동놀이다.

목계별신제는 충주시 엄정면 목계마을에서 상권의 강와 및 뱃사람의 안녕을 위해 정기적으로 지렀던 축제형 마을제사다. 목계마을은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목계마을 장시의 확대는 새로운 장시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누구든 이곳에 모여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고 잔치를 벌이거나 공동의 놀이를 통해 결속을 다지면서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났다.

투전, 골패 등의 도박은 물론 상업적 성격이 강한 유흥의 공간이 마련됐다. 기녀의 노랫가락이 우선했지만 봉건사회의 분화에 따라 토지를 잃고 유랑하며 결식하는 이들이 집단을 이루어 광대짓을 하는 사당패나 걸립패도 목계마을 장시의 유흥을 돋우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장시의 활성은 유흥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러나 목계마을의 장시는 근대화 과정의 발달과 비례해 쇠퇴했다.

1925~1930년 사이에 중부의 내륙지역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통이 되면서 그리고 충주~조치원간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활기는 점차 시들었고 1973년에 콘크리트 다리가 가설되면서 나룻배도 사라졌다. 한 해 뱃길의 무사와 상권의 활성화를 기원하던 뱃고사나 별신제도 사라졌고 이 과정에서 행했던 대규모의 줄다리기나 남사당놀음도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삼거리에 세워놓은 목계줄다리기와 별신제 유래비를 통해서 이전의 번성함을 짐작할 뿐이다. 전문에는 팔도에서 가장 흥청댔던 다섯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또 중원문화의 발상지였으며 중심지였다는 지역적 자부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도시가 융성했던 만큼 상권의 활성화 및 그 보존을 위한 당고사, 뱃고사, 별신제를 올렸으며 난장을 벌여놓고 남사당패를 불러들인 가운데 대규모의 줄다리기를 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성

* 입장-신장대를 앞세운 무당, 농악 1팀, 농악 2팀, 제머리마빡, 비녀목, 줄꾼 등의 순으로 입장한다.

* 별신굿-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전승되어 왔던 제의 양상으로 성황제의 제의 양상을 띠는 '당고사'와 남한강의 용신을 대상 신격으로 운행의 안전을 기원하는 '뱃고사', 지역의 상권 활성 및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는 무속제인 '별신제'로 돼 있다.

여기서 당고사는 정월 5일부터 10일가지 지속됐는데 정월 5일에는 아침부터 각 가정을 돌며 지신을 밟는 등 축원을 했고 밤에는 제관의 집에서 안반굿을 했으나 남한강의 수운이 쇠퇴하면서 지역의 경기가 침체되자 40여 년 전에 마을회의를 열어 제일을 정월 9일로 고정했다.

뱃고사는 정월 14일을 특정일로 고정해 당고사보다 성대하게 지낸 제의로 운항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모두가 제의에 참여했다.

별신제는 4월 초파일을 전후해 2~3일 동안 영신굿-오신굿-송신굿의 순으로 굿판을 별여 지역의 동회장을 중심으로, 중원지역은 물론 전국 팔도의 무당들이 제의를 주관했다. 그러나 1925~1930년 사이 중부의 내륙지역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통되고 충주~조치원간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활기는 점차 시들어 별신제의 명맥이 유지되지 못했다.

* 줄다리기-3년을 주기로, 2월 말경에서 3월 초순 사이에 4~5일 동안 행했다. 인근의 각 동리뿐만 아니라 충주, 원주, 장호원 등지에서 농악기를 앞세운 수 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줄은 정월 농한기를 이용해 짚을 꼬았고 약 800토매의 짚을 마련했는데 짚을 마련하는데만 20여일이 소요됐다고 한다. 동남서녀(東男西女), 남청여홍(男靑女紅)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 엄격했기 때문에 동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여겼다.

* 송신굿-참여자 모두가 뱃길의 무사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송신굿을 펼친다.

* 퇴장-줄을 어깨에 메고 물결을 상징하는 하늘색 천을 흔들며 퇴장한다.

△무등놀이

무등놀이는 무등을 타고 노는 민속놀이다. 무등타기라고도 하는데 원래 남사당패의 놀이였지만 일반 농악놀이로 확산됐다.

무등타기는 무동들의 깨끼춤과 동리, 삼동, 곡마단, 논고리, 맞동리 등 놀이 유형이 다양하다. 충주시에서는 달천지역에서 무등놀이가 전승됐다. 7월 호미씻기를 할 때 무등을 타고 놀았고 면 대항 풍물놀이에서 달천풍물팀이 무등을 타고 놀았다.

◎구성

인사굿, 멍석말이, 십자걸이, 자진몰이, 써래질, 상모놀이, 무등놀이, 쩍쩍이, 사통백이, 좌우치기, 굿거리, 12발 상모놀이 등으로 진행하고 있다.

놀이의 형태가 자주 변하기 때문에 박진감이 넘쳐 절로 흥이 난다. 놀이대는 꾕가리(상쇠, 부쇠, 종쇠) 3명과 징 2명, 장구 8명, 북 8명, 상모 8명, 잡색이(양반, 할멈) 2명, 농기 1명, 영기 2명, 무등 8명 등으로 편성하고 있다.

△양진명소오룡굿

양진명소는 탄금대 서쪽 대금산 아래 나루터로 달리 금휴포(琴休浦)라고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양진명소에 사당이 하나 있었는데 나라에서는 춘추로 향을 내려 양진명소의 제신인 오룡에게 국태민안을 기원했다. 가뭄이 들때면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고 치성을 올릴 때는 무당이 굿을 했다. 주민들도 농악가락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며 어울렸다. 이를 오룡굿이라고 했는데 오룡은 동서남북과 중앙을 지키는 다섯 마리 용을 상징했고 예부터 동쪽은 파란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붉은색, 북쪽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으로 방위를 표시했다.

◎구성

영신, 봉신, 봉신제, 대축사, 오신놀이, 송신 등으로 진행하고 있다. 1979년 20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충청북도 대표로 출연해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영신굿-주민들이 농악가락에 맞춰 흥을 돋우며 한판 놀이를 펼치는 형식으로 오룡을 청배하는 굿이다.

* 봉신굿-오룡을 지정한 장소에 모시는 굿으로 청색기, 적색기, 백색기, 흑색기, 황섹기를 오룡대 앞에 세우고 제례를 올린다.

* 오신굿-오룡을 달래는 굿으로 오룡이 아섯 물동이 위에 올라 무악에 맞춰 춤을 춘다.

* 송신-오룡을 돌려 보내는 굿으로 영신할 때 행렬과 같이 처음 오룡을 영신한 곳에서 다함께 흥을 돋우며 춤을 춘다.

△충주호상놀이

충주에서 행했던 옛 호상놀이를 재연한 것으로 대돋움(빈상여놀이), 노상가(상여소리), 회다지소리, 진사놀이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대돋움은 발인하기 전날 저녁에 상두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선소리꾼의 상여소리에 발을 맞춰 보는 민속놀이다. 진사놀이는 봉분제를 올린 후 사위에게 재담을 하며 칡으로 안경을 만들어 씌우거나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고 연촛대에 묶어 칠끈으로 끄는 등 장난을 치며 귀가하는 민속놀이다.

/ 김수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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