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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삼일운동=경거망동' 등 친일 행적 뚜렷
일제 비행기 '충북호' 모금때 2억원 희사
여고 건립땐 현15억 성금등 육영도 사실
허물과 공적 지닌 채 우암산 자락에 영면

  • 웹출고시간2013.11.10 19:20:59
  • 최종수정2013.11.10 19:20:57

민영은

민영은(閔泳殷·1870~1944·사진) 후손이 청주시를 상대로 제기한 토지반환 항소송에서 패소했다. 재판부는 소송의 대상이 된 토지에 대해 "민영은이 친일의 댓가로 취득한 것"이라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민영은은 최근 뉴스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정도와 일부에서 말하는 교육가로서의 활동은 그 실상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사후 70년이 다 돼 가는 지금, 지역사회는 민영은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민영은의 친일 행각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는 먼저 1937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이 됐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역시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김성수, 방응모 등이 중심이 된 '국민정신동원조선연맹'은 징병, 징용, 창씨개명, 공출, 일본어 사용 등에 대한 독려 활동을 펼쳤다.

1941년에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은 자발적인 황민화와 공출강화 활동을 펼친 바 있다. 이때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이었다.

그는 거액의 비행기 성금도 헌납하기도 했다. 매일신보 1939년 8월 18일자는 '애국기 충북호, 충북서 헌납결의, 민영은씨의 1만원을 필두로 성금벌써 6만여원'라는 내용을 제목으로 뽑기도 했다.

이때의 '충북호'는 비행기를 일컫는다. 당시는 쌀 한말이 1원이었고, 이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지금 돈 2억원 정도였다.

사가들은 민영은의 '자제회' 활동도 주요 친일 행각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다.

당시 친일관료나 지주들은 거느린 머슴이나 소작농을 끌어들여 반일투쟁을 와해시키려 했고, 이를 위해 결성된 조직이 '자제회'(自制會)였다.

‘청주사범’ 건립 때는 와병 중으로 거의 활동 못함.

청주 자제회의 발기인 명단에 제일 먼저 나오는 민영은은 3.1운동을 '경거망동'이라고 표현했고, 또 '불온한 자는 곧바로 경무관헌(일본경찰 지칭)에 신고하는 자를 회원으로 한다'라고 회칙을 정하기도 했다.

이 내용은 매일신보 1919년 4월 15일자에 실려 있고, 이 때는 청주서도 3.1운동이 막 일어난 직후였다.

그러나 민영은이 청주지역에서 육영사업을 펼치는 등 긍정적인 활동을 한 것도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나타났다.

1906년 청주에 '보성학교'라는 사립학교가 하나 세워질 당시 사비를 내놓은 사람이 민영은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7년에는 당시 공립학교인 '보통학교'(지금의 주성초등)가 세워졌고 이때 초대 교장을 역임한 인물 또한 민영은이었다.

이밖에 민영은은 1937년 지금의 석교초등학교가 세워질 때 개인땅을 학교부지로 내놨고, 1938년 당시 '제2 고등여학교'(지금의 청주여고)를 세울 때 8만원을 내놓은 바 있다. 8만원을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환산하면 지금돈 15억원의 거금이다.

그러나 민영은이 1941년 청주사범을 건립 할 때도 활동했다는 설은 크게 과장됐다는 것이 지역 사학계의 의견이다.

지금의 청석학원 설립자의 한 명인 김원근 옹은 1949년 5월 18일 반민특위에 나가 피의자 신분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도내 유지들의 규합으로 사범학교 유치운동이 열렸는데 회장이 민영은이오, 부회장이 본인이었는데 민씨는 중풍병으로 외출을 못하고 있었으므로 본인이 사실상 회장, 부회장을 겸한 셈이 되었습니다."

민영은은 이때 71살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이 진술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민영은은 허물과 공적이 다 지닌 삶을 74의 나이로 마감했고, 지금은 청주 대성동 우암산 자락에 영면해 있다.

/조혁연대기자

민영은의 재산은

'충북도정 반세기'(충청리뷰 간)에 의하면 해방직후의 농지개혁 당시 지금의 청석학원이 401ha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 민영은家의 재산이었다.

그가 아들 1명, 손자 3명, 은성장학회 등에 남긴 재산은 대략 366ha였고, 평(坪)으로 환산하면 '110만평' 정도가 되고 있다.

그의 본가는 청주 남문로 청원군청 앞에 자리잡고 있었고 시민들은 이 대저택을 '민구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천태종 명장사 자리에도 개인 별장을 갖고 있었다.

이 별장은 1946년 전국을 순회 중이던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1박을 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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