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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에 입문한 지 올해로 꼭 20년이 됐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하는 생각에 나 스스로 깜짝 놀랐다. 돌이켜 생각하면 언론에 발을 들여 놓은 동기는 너무나 간단했다.

대학졸업을 앞두고 취직준비에 정신없던 어느날 중앙일간지에 난 고향 청주의 한 창간신문사 신입기자 채용계획이 인생의 항로를 바꿔 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언론사 입사는 '언론고시'라 해서 누구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때문에 많은 졸업생들이 눈높이를 낮춰 공기업이나 다른 사기업으로 취직을 하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 고향에서 신문사가 창간을 한다고 하니 가슴이 뛰었다. 혹시나 하고 원서를 냈고 운좋게 합격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합격통지서를 받고 나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스러웠는지 모른다. 평소 선망하던 기자의 꿈을 이뤘거니와 취직이라는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기자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수습'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선배들로부터 혹독한(?) 지도를 받을 때에는 "내가 왜 길을 선택했나"하는 후회도 들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얼차려도 몇차례 받았다.

하지만 그럴때 마다 동기들의 따뜻한 위로와 소주 한잔이 버팀목이 돼주었다. 이런 조련과정을 거쳐 시작된 초년병 기자생활은 좌충우돌 그자체였다. 마치 정의의 사도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의의 사도'(?)가 된 내 눈에 비춰진 이 세상은 온통 부정적인 것들로만 가득차 있었다. 툭하면 논쟁을 벌였고, 그러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문제의식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기자라는 어설픈 생각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를 나눈 형제 같던 입사동기들이 회사를 떠났다. 더 여건이 좋은 회사로 간 사람도 있고, 아예 적성이 맞지 않는다며 진로를 바꾼 사람도 있다. 나 또한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서울의 언론사로 갔다 다시 고향 청주로 돌아와 2~3군데의 회사를 옮겨다니다 현재의 회사에 몸담고 있다.

그렇게 '신문쟁이'로 지낸 시간이 20년이 흘렀고 그동안 언론환경은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바뀌었다.

거창하게 다른 지역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좁은 충북 지역에서만해도 물리적인 변화가 엄청났다. 3개에 불과했던 신문사가 지금은 6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신문사에 몸담고 있는 전체 종사자는 그다지 크게 늘어나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부분이 지역신문이 왜 현재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바로미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20년전 당시 한 신문사당 기자인력은 본사 편집국을 기준으로 40~50명에 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지금 신문사의 편집국 인력은 회사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20년전의 절반 정도에 그치고 있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신문사가 배로 늘어난 만큼 그곳을 일터로 하는 인력도 배가 늘어나는 것이 맞는데 오히려 절반으로 감소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신문사 설립요건이 완화되면서 누구나 일정 요건만 갖추면 신문사를 세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진입장벽이 무너지면서 신문시장은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렇게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신문사는 생겨났지만 종사자는 회사마다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은 결국 모든 여건이 열악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론사 난립으로 인한 주 수입원인 광고의 감소, 그로인한 저임금, 고급 인력의 이탈, 전체적인 지역신문의 수준 저하 등 악순환의 연속이 신문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런 악순환의 시간이 10여년 계속되면서 신문위상은 말할수 없이 추락했다. 외부의 시선도 따가왔다. 지역적인 여건을 고려한다면 신문이 너무 많지 않느냐 하는 냉소적인 지적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아무튼 이런 여건에서 20년을 보냈다. 속된 말로 '단 맛' 보다는 '쓴 맛'을 더 많이 본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단 맛' 보다는 '쓴 맛'을 더 봐야 할 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20년을 언론인이라는 자존심과 신문의 본령(本領)에 충실한다는 소명의식이 오늘을 있게끔 한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길 희망해 본다.

어제(4월7일)가 마침 1년중 유일하게 '신문쟁이'들이 평일에 쉴 수 있는 신문의날이었다. 오늘도 일선 취재현장에선 많은 기자들이 사회정의 실현과 독자들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뛰고 있다. 모든 여건이 미흡한 상황인데도 그들은 지역사회의 등불이라는 사명감으로 살아가고 있다. 모쪼록 이 기회를 빌어 선후배와 동료 언론인들의 건승을 기원한다. 신문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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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