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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1.03.01 17:56:2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필자가 C일보 문화부 기자로 있던 지난 1981년, 한국화단의 거목인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이 청주에 왔다. 만년에 낙향할 곳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그는 낙향지를 찾다 어머니 한윤명 여사가 묻힌 청원군 북일면 형동리 당산(堂山) 마을을 길지로 잡았다. 뒷문만 열면 어머니의 묘소가 보이는 곳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이곳에 머물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오밀조밀한 집터와 근처의 야산도 화실을 짓는데 한 몫을 했다.

나는 필담으로 운보와 인터뷰를 했다. 어릴 때 장티푸스를 앓아 농아가 된 그는 서툰 솜씨로 말을 했지만 듣기가 힘들어서 속 깊은 이야기는 필담을 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는 당산마을에 한옥으로 작업실을 짓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아울러 농아복지를 위한 구상도 털어놓았다. 운보의 첫 인상은 호랑이 같았다. 호랑이 얼굴에 빨간 양말을 신고 파이프를 문 모습에서 예술가의 정열과 멋이 저절로 배어나왔다.

작업실은 예상대로 척척 진행되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대가의 작업실을 위해 서로 아귀를 맞춘 지 몇 해만에 형동리 당산마을에는 대궐 같은 작업실이 들어섰다. 마당 남쪽에 조성된 연못에는 비단잉어가 헤엄을 쳤고, 집 뒤로는 운향(雲鄕)미술관이 들어서 예술의 향기를 뿜어냈다. 미술관 이름을 '운향'이라고 정한 것은 자신의 호 '운보'의 머리글자와 먼저 세상을 뜬 아내 우향(雨鄕) 박래현 여사의 호를 합친 것이다.

주위에는 도자기 공방도 생겨났고, 분재공원, 수석공원, 조각공원 등도 들어섰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운보 타운'이라고 불렀다. 운보 타운은 단번에 관광명소로 부각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도 관광객과 미술 동호인이 몰려왔고 청주를 찾는 중국관광객들도 이곳을 필수코스로 선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신혼부부의 야외사진촬영지로 유명세를 얻으며 인생의 새 출발을 앞둔 신혼부부들을 끌어들였다. 운보 타운은 철저한 문화관광지로 자리매김을 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운보의 집과 미술관에서 운보의 예술혼을 만끽했고 공방과 찻집에서 여독(旅毒)을 풀었다. 재수가 있으면 운보의 작업광경을 볼 수도 있었다.

나는 C일보 창간 00주년 기념 휘호를 얻고자 운보와의 특대(特待)를 요청했고 이 자리에서 겁 없이 창간휘호를 부탁했다. 운보는 노발대발했다. 필담으로 운보는 "그런 명령은 회사에 가서 당신 부하한테나 해..." 순간 나는 눈앞이 노래졌다. 이미 운보의 창간휘호를 넣기로 계획돼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운보가 버섯찌개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남주동 시장으로 가 표고버섯을 산 다음 용기를 내어 다시 선생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휘호 얘기는 입에도 담지 않았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점심까지 함께했다. 선생은 "창간 휘호· 알았어"하시더니 밥상을 물리고 지필묵을 들어 창간기념 휘호를 그려주셨다. "이젠 됐다" 패잔병처럼 물러났다가 순간에 반전되어 전승가를 울리며 휘호를 받아온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운보의 집은 이처럼 문화부 올챙이 기자의 사연이 있는 곳이다. 나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그들만의 사연을 남기고 또 엮어갔다. 이곳은 청주지역에서 미술 쪽으로는 유일하다고 할 만한 문화의 나들이 코스다. 초정과 가까운 거리여서 겸사겸사 들를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일상에 지친 마음 때를 씻고 때로는 구겨진 마음을 다림질하여 알록달록하게 색칠해보기도 하는 미술관광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운보 선생이 세상을 뜬 후 이곳은 태엽 풀린 벽시계처럼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운보의 집 일부 토지와 공방 등이 경매로 넘어가 주인이 바뀌었다. 서로의 불협화음속에서 한 때는 주차장 새 주인이 주차장 입구에 금줄을 쳐놓는 해프닝도 있었다. 운보의 집은 불법 개보수로 검찰의 수사를 받기도 했으며 운보문화재단의 이사진이 교체되기도 했다. 운보공방, 운보갤러리 등 운보의 집 일부는 최근에 또 주인이 바뀌었다. 유찰을 거듭한 끝에 K모씨에게 낙찰됐다. 운보문화재단과의 소통으로 그간의 상처를 말끔히 씻고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도록 힘썼으면 한다. 우리 지역의 이 훌륭한 문화 콘텐츠를 그냥 사장시켜서야 되겠는가. 공멸이 아닌 상생의 방법을 연구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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