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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뙤약볕 아래 사래 긴 밭을 매던 할머니는 손자인 나에게 막걸리 심부름을 자주 시켰다. 나는 그 심부름이 약간 창피했지만 할머니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가끔 주는 용돈이 할머니의 고쟁이 속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 하나 창피한 이유는 양조장 집에 나와 동갑나기 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개인적인 사정을 어찌 할머니가 알겠는가.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노란 주전자를 들고 둑길을 따라 막걸리를 받으러 갔다. 양조장은 다리 건너에 있었다. 마음씨 좋은 황씨 아저씨를 만나야 주전자 가득 막걸리를 담아올 수 있었다.

막걸리 독은 엄청나게 컸다. 된장, 간장 단지의 서너 배는 됐다. 황씨 아저씨는 "꼬맹이 또 왔구나"하며 그 큰 술독을 됫박으로 휘휘 저어 주전자에 넘치도록 담아 주었다. 황씨 아저씨는 술 배달 자전거에 막걸리 통을 7개나 싣고 말 티를 넘었다는 신화적 존재다. 한 번은 동네에서 자전거 대회가 열렸는데 황씨 아저씨는 막걸리 배달 짐자전거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그 큰 술독에 막걸리가 가득 차있으면 쉽게 술을 퍼서 주전자에 담았지만 바닥이 들어날 때는 숫제 물구나무를 서야 막걸리를 퍼 올릴 수 있었다.

나는 둑길을 걸으며 주전자에 입을 대고 한 모금씩 막걸리를 마셨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먹다보면 얼얼한 취기가 올라왔고 술 주전자는 3분의 1정도가 줄어들었다. 할머니는 대뜸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았다. "에이구, 인심도 박하지, 이게 한 되야, 주전자는 채워줘야지..."

나는 그 다음부터 작전을 바꿨다. 술이 모자라는 만큼 물을 부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막걸리 맛이 변했어, 이렇게 싱거워서야 원..."

탁주(濁酒), 농주(農酒)라고도 불린 막걸리는 오래전부터 '국민의 술'이었다. 정종이라고 하는 고급술은 명절 때나 구경할 수 있었다. 모내기나 김매기를 할 때도, 동네잔치나 운동회가 열릴 때에도 대개 막걸리를 마셨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막걸리는 삶의 언저리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인생의 동반자였다. 술집 골목으로 유명한 텍사스 골목에서도 막걸리를 주로 팔았다. 맥주나 정종은 요정 등 고급술집에서나 팔았다. 선술집에서 맥주를 시키면 대접이 금방 달랐다. 코머리 기생(퇴기)이 된 주모는 대뜸 "김 양아, 손님 안방으로 모셔라"하며 코 먹은 소리를 냈다.

대학시절에도 거의 막걸리를 마셨다. 학교축제가 열리면 으레 막걸리 통이 굴러다녔고, 대학가에 진을 친 학사주점에서도 거의 빈대떡 안주에 막걸리를 팔았다. 그래서 과 대항 축구경기가 열릴라 치면 동요 '무궁화'를 패러디한 응원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막걸리, 막걸리, 우리나라 술,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술..."

그렇게 국민의 사랑을 받던 막걸리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소주나 맥주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입맛도 변하고 국민소득이 높아짐에 따라 점점 고급술을 찾게 되었다. 국민주의 자리를 소주나 맥주 등에 빼앗긴 막걸리는 소비가 떨어짐에 따라 푸대접을 받았고, 그런 영향아래 동네 양조장이 하나 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사양길을 걷던 막걸리가 최근 웰빙 붐을 타고 다시 인기회복에 나서고 있다. 사실 술중에서 막걸리만큼 영양가가 많은 술이 없다. 쌀을 빚어 만든 막걸리는 영양의 보고(寶庫)다. 필수 아미노산은 물론, 비타민 B군, 비타민 C가 풍부한 웰빙 식품이다. 영양가를 구체적으로 모르던 고려시대에도 이규보는 술을 의인화한 국선생전(麴先生傳)을 지어 발효주의 좋은 점을 은근히 찬미했다.

천년을 두고 범국민적 사랑을 받아 온 막걸리가 인기의 고지를 탈환하면서 소비가 되살아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등지로 수출이 되어 외화벌이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고사위기에 처한 동네 양조장이 되살아나고 있는데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막걸리의 인기가 높아지자 대기업에서 막걸리 제조에 뛰어들어 영세업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SSM(기업형 슈퍼마켓)으로 골목 상권까지 장악한 대기업이 서민의 술, 막걸리 제조까지 휩쓸어가서야 되겠는가. 서민의 몫, 중소기업의 몫은 남겨두는 게 비즈니스의 미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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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