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2024.04.25 15:13:33

신현애

수필가·공인중개사

시내 o초등학교 옆 골목을 지나다 보니, 흙탕물이 튀어 지저분한 점포 출입문에 '오래된 물건 삽니다'라는 글자가 붙어있었다. 유리문 안에는 풍금 서랍장과 손가락에 힘주어 돌리던, 몸통이 시커멓고 묵직한 다이얼 전화기가 어슴푸레 보였다. 몇 점을 보아도 값이 나갈 것 같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한때 유행했던 '빈티지 문화' 지금도 수도권의 상가에는, 문갑과 장롱 등 고가구가 반들반들하게 손질되어 진열된 물건들과는 사뭇 달랐다. 디지털 환경이 나날이 현란해지고 있는 시대, 아날로그적 감성 소유자들의 취향을 고려한 가게주인의 나이가 왠지 지긋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사흘째 내리고 있던 날, 저녁 뉴스를 보려고 텔레비전을 켰을 때 앞의 화면이 '확'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지나간 화면 속에서 문득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오래된 4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J 읍, 낯설고 물선 곳에서 꿈에 차 있던 신혼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생소한 곳에서 단조로운 하루하루의 생활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주일날 성당에서 만난 두 여인이 있다. 그녀들의 질박한 모습에 정을 붙이며, 맑은 날이면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논둑길을 밟았고, 농다리를 건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불가 용어에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때 그녀들과의 인연이 시절 인연이었던가 싶다.

그 후, 나는 남편의 전근으로 그곳을 떠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현실에 종종대느라고 지난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사람의 일생은 언제나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일진대, 만남은 새로운 기대가 있는 반면에 이별은 남는 자의 가슴에 더 큰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있을 터. 그들과의 추억이 그곳에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화면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난 후 갑자기 그녀들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튿날 알음알음으로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녀가 나를 찾으려고 수소문 해 보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더욱 미안한 생각이 커졌다. 아득하게 멀어져 간 오래된 이야기는 진진하게 이어져 곧 만날 것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약속한 날, 이른 아침부터 설레는 가슴을 안고 페달을 밟았다. 구불거리던 길이 곧게 뚫려서 채 30여 분 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였는데…. 세월이 참으로 빠르게 흘러갔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 저편에 남아 있던 모습을 떠올리며 약속한 식당에서 만났다. 사계절이 열 번이나 지나고 마주한 그녀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당시 40대에 만난 그들이 80세가 된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K 교수의 어머니는 92세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이다. 까물까물하는 정신에서도 꼭 잡고 놓지 않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오래된 낡고 헌 베개란다. 새로 나온 기능성 좋은 베개를 사드린다고 해도 한사코 마다한다고 하니, 노인은 오래된 베개에서 어떤 감성에 젖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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