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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표

수필가·충북바이오산학융합원 사무국장

뉴스를 보다가 아내와 다퉜다네. 아나운서의 말이 발단이었지. 아나운서가 말하길 '20대 초반의 한 청년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죽었는데, 이 청년은 대학을 안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어머니와 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같이 뉴스를 보던 아내가 한숨을 쉬더라고.

"아유, 대학도 안 가고 돈 벌겠다고 공장에 취직했는데, 젊은 나이에 저렇게 가다니, 슬프네요."

나는 아내에게 화풀이하듯 쏘아붙였어.

"안 가다니? 못 간 거야, 이 사람아. 국어 선생 출신이 우리말도 할 줄 몰라!"

미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한 대 얻어맞은 아내가 가만히 있을 리 없고, 다툼이 되는 건 당연하겠지. 다툼의 책임은 전적으로 공연스레 아내에게 시비를 건 내게 있지만, 내가 '안 가고'와 '못 가고'에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한 데는 자네가 생각나서라네.

6년 전쯤이던가. 자네가 내 사무실로 자네 아들의 결혼식을 알리는 청첩장을 보내왔지.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쓴 손 편지와 함께. 그때까지 우리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나는 자네의 전화번호도, 어디 사는지도, 뭘 하는지도 몰랐고. 그러니까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거지. 그런데 자네가 50여 년 만에 아들의 결혼식을 불쑥 알려온 거야. 나는 그 청첩장을 받고는 왠지 꼭 그 결혼식에 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네.

결혼식장에서 우리는 서로를 단박에 알아봤지. 자네 부인도 나를 보더니 별도 소개를 하지 않았는데도 반색하며 맞아주었지.

"이 국장님! 오늘 처음 뵙지만, 우리 남편이 국장님이 TV에 나올 때마다 자기 친구라고 얘기를 하두 많이 해서 굉장히 친한 분 같아요."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결혼식장엘 가도 대부분은 예식을 보지 않고 혼주들에게 인사만 하고 만다네. 국민학교 동창생들의 자녀 결혼식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야. 그렇지만 그날은 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네. 자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주례사를 했지. 나는 그 주례사를 들으며 울었고.

자네는 맨 앞줄에 앉을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공부는 반에서 1~2등이었고 글씨를 아주 잘 썼지. 연설도 곧잘 했고, 리더십도 있어서 반장을 했지. 말하자면 자네는 키가 작다는 것만 빼놓고는 뭐든지나보다 잘했는데-특히 공부는 더 잘했는데, 말도 안 되게 자네는 국민학교만 다녔고 나는 대학교까지 다녔지. 단지 가정 형편의 차이 때문에 말이야. 그러니 자네는 내 얼굴이 TV에 비칠 때마다 자네 부인에게 "쟤가 내 친구야." 하면서,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 일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지난 세월을 더듬었을 테지. 내게 먼저 전화도 못 하고 마음속으로만 나를 친구로 붙들고 있었을 테지.간혹 그 감정을 자네 부인에게 들키기도 했을 테고.

떨리는 목소리로 주례사를 읽어나가는 자네를 보고 있으려니, 자네의 지난 세월, 그 아픔과 슬픔이 내게 전해져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네. 그래도 국민학교 때는 제법 친한 사이였는데, 자네가 중학교도 못 다녔다는 이유로 내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가 정말 부끄러웠다네.

여담이지만, 마침 그즈음에 내 업무 소관인 '충북인재양성재단' 이사회가 있었다네. 이사장인 도지사께 자네 얘기를 하고, '장학금 지급 기준'을 성적순보다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좀 더 쉽게 받을 수 있도록 조정했다네. 자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제 2023년 새해가 오는군. 나는 새해가 되면 항상 기원하는 게 있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뛰노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것일세. 예를 들자면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사람들을 배려하는 그런 세상을 말이지. 자네 때문에 갖게 된 꿈이라네.

내 친구 L, 새해 복 많이 받으시게. 그리고 새해에 만나면 소주 한 잔 사야 하네. '안 가고'와 '못 가고'를 갖고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다툰 건 뭐라 해도 자네의 책임이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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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너 소사이어티 충북 72번째 회원' 변상천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

[충북일보] "평범한 직장인도 기부 할 수 있어요." 변상천(63)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은 회사 경영인이나 부자, 의사 등 부유한 사람들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1월 23일 2천만 원 성금 기탁과 함께 5년 이내 1억 원 이상 기부를 약속하면서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충북 72호 회원이 됐다. 옛 청원군 북이면 출신인 변 부사장은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부모님을 도와 소작농 생활을 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그의 집에는 공부할 수 있는 책상조차 없어 쌀 포대를 책상 삼아 공부해야 했을 정도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삼시 세끼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마을의 지역노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변 부사장은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왔다"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옥천군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충북도청 건축문화과장을 역임하기까지 변 부사장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아지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