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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숙

수필가

작은 인쇄소를 운영한다는 한 여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의 말인즉 노쇠한 할아버지 한 분이 며칠 전 다녀가셨는데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연락을 해보았다는 것이다.

그 낯선 노인은 퀭한 눈으로 무엇인지 보자기로 싼 물건을 품에 안고 인쇄소를 들어오시더란다. 힘겨운 듯 탁자에 털썩 내려놓으며 숨을 몰아쉬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곤 떨리는 손으로 빛바랜 공책과 크고 작은 낡은 수첩, 때론 낱장 등에 빽빽이 육필로 쓴 글을 수북이 모은 보자기를 풀어 보이며 책을 2권만 내달라고 하셨던 모양이다.

글을 쓴 사람은 본인이 아니고 한평생 해로한 할머니가 가난하고 고된 생활에 속병을 앓을 때마다 써 놓은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병상에 누워 꼼짝을 못 하니 세상 떠나기 전 품에 책 한 권 안겨주고 싶으면 좋을 것 같다며 할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더란 말은 가슴 아릿했다.

그녀는 안타깝지만 단지 인쇄업체일 뿐 원고 교정이나 편집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죄송하다는 설명을 여러 번 드렸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제대로 이해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묵묵히 듣고 계시다가 더 간청도 없이 배시시 웃고는 고개만 끄덕이며 자리를 떠나셨다는 거다.

그녀는 마침 신문에 난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에 관한 기사를 읽었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담당자인 내게 물었다. 혹시 몰라서 그 노인의 전화번호를 갖고 있단다. '참 딱해 보이셨어요.'라는 말을 그녀는 강조하듯 반복했다. 생면부지의 할아버지이지만 사정을 들어줄 수 없었던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간절함으로 또박또박 번호를 알려주었다.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전화기 버튼을 다시 누를 때마다 잠시 고민이 되었던 건 사실이다. 그간의 경험상 할머니의 육필원고 정리가 만만치 않아 진행상 어려움은 있을 거란 짐작이다. 그냥 지나치기엔 그 할아버지와 인쇄소 주인의 맑고 따뜻한 바람이 이미 내 안에 파문처럼 일었다.

결국, 어렵사리 할아버지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는 가뿐 호흡으로 한마디, 한마디가 버거웠다. 내가 왜 연락을 했는지의 과정을 서너 번 되풀이해서야 겨우 알아들은 듯 순간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그의 건강 상태는 썩 좋지 않다는 느낌이 충분히 전해졌다. '고마워요. 몸이 나아지면 찾아갈 테니 꼭 책으로 만들어 줘요.' 더듬더듬 간신히 말을 마치고 희미하게 허한 웃음을 남겼던 노인의 여운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마을 도서관이 하나 사라진다."라는 말이 있다. 마을에서 70년, 80년 살아온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도서관이라 여겼던 그들의 발상이 속 깊다. 마을을 지켰던 노인들이 타계하기 전에 그 공간의 역사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여 보관함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과거야말로 현재를 지탱하기 위한 거울일 테니.

누군가의 책 값어치를 백만 명쯤 알아준다면야 참으로 훌륭한 책일 것이다. 하지만 딱 한 사람이라도 그 책이 지닌 특별한 사연에 고즈넉한 값어치를 깨닫고 느낄 수 있다면 그 또한 고마운 발견 아닌가.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어떻게 최선으로 살아갔는가. 글로 쓰지 않았으면 그냥 흘러갔을 땀과 한숨 기쁨과 희망, 애환의 삶을 저마다 소중하고 살뜰한 이야기로 남긴다는 건 먼 미래와의 이음 고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든다. 인쇄소를 다녀간 할아버지, 그 도서관이 소멸하기 전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가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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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