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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문화탐방 - 조선시대 청주 빙고(氷庫)

"금보다 더 귀한 얼음을 보관하라"
사직동 호국로 단독주택 유력 장소 추정
무심천서 채취 후 750m 언덕으로 운반
조선시대 '빙고리'라 불려… 발굴조사 필요

  • 웹출고시간2014.03.27 19:02:18
  • 최종수정2014.03.27 21:15:35

1950년대 한강의 채빙 모습. 채빙한 얼음을 빙고에 보관했다.

한양 서빙고(西氷庫)를 털어라!

좌의정에 의해 누명을 쓴 우의정의 서자, 덕무(차태현 분). 얼음 독점권을 차지하려는 좌의정의 뒤통수를 칠 묘안을 떠올린다. 바로 금보다 귀한 권력의 상징, 서빙고의 얼음을 통째로 털겠다는 것.

한때 서빙고를 관리했지만 좌의정 일당에 의해 파직당한 동수(오지호 분)와 손을 잡고 조선 최고의 '꾼'들을 모은다. 그리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환상적인 계략을 세워 서빙고의 얼음 3만정을 빼내는데….

지난 2012년 개봉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한국영화 줄거리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금보다 귀한 대접을 받았던 '얼음'을 소재로 했다. 당시만 해도 꽁꽁 얼어붙은 강물을 쪼개 얼음으로 썼던지라 높은 분들만 가까이 둘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때문에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인 빙고(氷庫)에는 웬만한 금고(金庫)보다 삼엄한 경비가 붙었다.

◇삼국시대부터 빙고 등장

각종 문헌에 따르면 빙고는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얼음은 보관하는 우리나라 빙고는 주로 돌로 쌓아 냉기를 유지한 석빙고 형태를 띠었다. 겨울에 큰 강에서 얼음을 채취·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했다. 일종의 '천연 냉장고'였던 셈이다.

지금 남아 있는 빙고 중에는 경주 석빙고(보물 제66호)가 대표적이다. 한 때 신라시대 빙고로 알려졌으나 현재의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고려시대에도 빙고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나 아직까지 확인된 바는 없다. 조선 초기에는 왕명으로 제도화 돼 태종 5년(1405년)에는 6조의 업무 중 예조에 속하게 된다.

◇조선시대 얼음창고 일반화

조선시대 청주 빙고가 있었던 자리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집.

ⓒ 임장규기자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장빙제도(藏氷制度)가 있어 말기인 고종 때까지 이어졌다. 현존하는 유구를 볼 때 조선시대 빙고는 대개 성 밖의 강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가 한강 북쪽연안에 설치됐으나 목조 빙고였던 탓에 내구성이 적어 오래 전 손실됐다.

당시 동빙고에는 제향(祭享)과 공불(供佛) 등에 사용할 얼음 1만2천44정(丁), 서빙고에는 어선(御膳)과 빈식(賓食) 등에 쓰일 13만4천974정을 보관했다고 한다.

만일 빙고에서 얼음을 잘못 보관해 중추(仲秋) 이전에 얼음을 다 쓰게 되면 이를 맡아보는 관리가 처벌을 받았다. 겨울에는 사한제(司寒祭)를 열어 얼음이 두껍게 얼기를 기원했다.

조선 빙고는 대개 지하에 깊게 굴을 파고 안쪽 벽을 석재로 쌓아올렸다. 내부의 밑바닥은 장방형으로 경사지게 만들었다. 바닥에는 배수구를 설치해 빙고 내의 용해수가 빠지도록 했다. 천장은 잘 다듬은 돌로 무지개 모양으로 4~5개씩 연결했고, 그 사이마다 구멍을 뚫어 공기를 통하게 했다. 냉매(冷媒)로는 주로 소금과 겨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형태로 지금까지 보존된 곳은 경주석빙고와 안동석빙고, 창녕석빙고, 청도석빙고, 현풍석빙고, 영산석빙고 등이 대표적이다.

◇청주지역 빙고

조선시대 청주 빙고 터에서 내려다본 전경.

ⓒ 임장규기자
청주에도 조선시대 석빙고가 존재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진 않다. 다만 흥덕구 사직동 호국로 123번길에 그 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 역사의 흔적을 어렴풋이 전하고 있다.

지금은 단독주택이 지어진 이 곳은 지난 1995년 서원향토문화연구회에서 청주지명조사를 하면서 빙고 터로 꼽은 장소다. 당시 집주인은 "유난히 여름이 시원하고, 겨울이 따뜻하다"는 증언을 했다. 조선시대 동네 지명이 '빙고리'였던 점도 유력한 근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마다 3단(사직단, 성황단, 여단) 1묘(문묘)가 있었고, 빙고(터)가 존재했다. 빙고리라는 지명은 이 때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역사적 근거로 볼 때 사직동 호국로가 빙고 터로 가장 유력하게 손꼽히나 보다 정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선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빙고 터로 추정되는 오른쪽과 반대편의 주택 높낮이가 다르다. 아마도 일제가 도시개발을 하면서 빙고 터를 복토한 것으로 보인다.

ⓒ 임장규기자
현재 지적도 상 무심천과의 직선거리는 638m. 과거 1920년대 대홍수 뒤 일제가 사행(蛇行) 형태였던 무심천을 직강(直江)으로 정비하면서 빙고 터와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대홍수 전 조선시대 무심천 물길을 감안하면 당시 빙고와의 직선거리는 750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무심천에서 채취된 얼음이 바로 옆 장소나 평지에 보관되지 않은 데에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얼음을 옮기기엔 다소 먼 거리일 수 있으나 빛이 잘 들지 않고 바람이 잘 부는, 즉 얼음이 녹지 않는 장소를 택하다보니 언덕 중턱이 빙고지로 선택된 것이다.

청주시 문화관광과 라경준 학예사는 "빙고는 해방 후 도시개발에 의해 파괴된 것 같다"며 "주택 재개발 시 발굴조사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뒤 관광자원화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임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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