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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문화탐방 - 임진년의 불꽃 '청주성 전투'

임진왜란 첫 육상전투 승전지
승병·의병·관군 연합군 합동작전
필사저항에 왜군들 조총 버리고 달아나
영규대사·조헌·박춘무 청주 지킨 의인

  • 웹출고시간2014.03.09 13:04:41
  • 최종수정2014.03.09 13:06:51

복원된 청주읍성 성벽.

통일신라 때 처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청주성(淸州城)은 1천년 세월의 거친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청주를 지켜왔다.

비록 102년 전 일제가 시가지 개정이란 미명 아래 읍성을 허물어버리긴 했지만 최근 청주시가 일부 구간을 복원하며 그 위용을 되살렸다.

한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청주성은 1980년대 초 전남 구례 운조루에서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가 발견되고서 세간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주읍성도를 분석한 결과, 청주읍성은 둘레 1.7㎞·높이 4~5m의 장방형 구조를 띠면서 청남문(남문)과 현무문(북문), 벽인문(동문), 청추문(서문)을 기준으로 현재의 성안동 일대를 둘렀다. 남문·북문 등은 일제식 방위 명칭으로 지금의 남문로, 북문로, 서문동 지명에 영향을 미쳤다.

1910년대 청주읍성 청남문.

4대문 중 가장 큰 문인 청남문(淸南門)은 구한말 때 찍은 사진 한 장이 전해지며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무사석으로 기단을 쌓아올렸고 출입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팔작집 모양의 2층 누각에는 '淸南門' 현판이 걸려 있다.

지금의 청주약국 앞에 있던 주 출입문으로, 이 문을 지나 우리은행 쪽으로 직진하다 왼쪽으로 꺾으면 충청병마절도사영문을 통과, 충청병영에 이르게 된다. 충청병영은 당초 충남 해미읍성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후 이전됐다. 해로(海路)보다 육로(陸路)를 중요시하는 쪽으로 국방체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임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맹위를 떨친 바다와 달리 육상 전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왜군이 쳐들어온 지 세 달이 지나서야 최초의 승리를 거뒀는데 그곳이 바로 청주성이다.

전국 주요 성이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왜군에 문을 내줬고, 한양까지 함락된 상황에서 어떻게 청주성을 재탈환할 수 있었을까. 시계바늘을 1592년으로 돌려보자.

청주성탈환을 재연한 그림.

ⓒ 출처=디지털청주문화대전(제작자 김대중)
4월13일 15만의 왜군이 부산을 들이닥쳤다. 조선군의 활은 왜군의 조총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이튿날 부산진을 점령한 왜군은 세 길로 나눠 북상했다. 관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2주 만에 한양을 내줬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누란의 위기에 처하게 됐을 때 전국에서 의병들이 들고 일어섰다. 최초의 육상 승전지인 청주성 역시 의병들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청주는 6월23일 이후 구로다 부하가 거느리는 부대에 점거돼 있었다. 방어사 이옥과 조방자, 윤경기도 패해 달아났고, 의사 박우현도 전사해 사기가 바닥을 쳤다.


영규대사가 승병 500여명을 거느리고 청주성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는데,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생 조헌과 청주 복대동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 박춘무가 이 소식을 듣고 합류했다.

전시 상황은 이랬다. 왜군은 7월17일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지휘한 제1차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명나라 군대의 참전에 따라 장기농성전으로 전환했다. 필요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호남으로의 진출을 도모하며 호남 입성의 교두보인 금산과 청주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방어사 이옥이 청주성 공략에 실패하자 관찰사 윤선각은 영규대사에게 지휘관을 맡겼다. 영규대사는 7월15일 즈음에 청주성 서문 밖 빙고현(현 모충동 고개)에 도착했다. 의병진을 셋으로 나눠 주둔시킨 뒤 왜군을 상태를 살폈다.

7월29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승병과 관군 연합군이 총공격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차 탈환작전의 실패였다.

이 무렵 의병장 조헌이 금산 수복 계획을 바꿔 청주로 향했다. 복대동 일대의 박춘무 의병대와 연기현에 머물던 이옥 관군이 잇따라 합류했다.

8월1일 새벽, 연합군은 서문과 남문을 동시에 쳤다. 조헌이 서문을, 박춘무가 남문을 맡았다. 왜군은 당황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필사적 저항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승병과 의병들의 전의는 왜군을 압도했다. 지리를 이용한 신출귀몰한 전술은 성공적이었다.

피로 물든 전투는 폭우로 소강상태를 맞게 된다. 잠시 서로의 동향을 살피는가 싶더니, 갑자기 왜군이 북문을 통해 죽산 방면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될 조선군과의 전투가 두려웠던 것이다.

청주성 탈환 재현행사 모습.

임란 첫 육전 승전보. 단순히 청주성 탈환에 그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왜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고, 대규모 명군이 참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청주성 수복 후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호남으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진군했다. 1천700여명의 의병대는 전공(戰功)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상당수 해산 당했다.

마지막까지 금산전투에 몸을 던진 700명 의병은 조헌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임란이 끝난 뒤에는 금산 칠백의총에 묻혔다.

청주성의 또 다른 영웅, 박춘무는 진천으로 진격했다. 왜적을 10일간 포위하고 있었는데, 원병이 오지 않아 부득이 한 쪽을 풀어줄까 했다.

그 때 아녀자들이 술과 음식을 나르며 의병대를 위로했다. "이 고장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고 있는 것은 모두 장군의 힘인데, 만약 적을 풀어주면 반드시 도륙을 자행할 것이니 어찌 차마 우리를 버리려 하십니까"

아녀자들의 애원에 박춘무는 눈물을 흘리며 이들을 달랬다. 밤이 되자 박춘무 의병군은 세력이 약한 왜군의 남쪽을 습격해 큰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진천 일대 민심이 안정됐다.

이 싸움에 그의 아들 동명과 춘번이 선봉으로 나섰는데, 박춘무는 평소 자제들에게 "전진(戰陣)에서 용기가 없는 것은 효가 아니다"라고 훈계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청주 중앙공원에는 박춘무와 조헌의 전공을 새긴 전장기적비가 남아 임진년의 불꽃을 후손들의 가슴에 불태우고 있다.

/ 임장규기자

자료도움=박상일 청주대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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