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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 문화탐방 - 산업화 초창기 청주의 풍경

1940~70년대 성안길의 추억, 기억하십니까?
청주 뻬까리·홍콩 양복점 '아롱아롱'
제일교회 망선루를 교실로 쓰던 세광고

  • 웹출고시간2014.01.23 19:42:12
  • 최종수정2014.03.09 13:06:48

편집자

충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없다. 그래서 '내륙'이라 불린다. 내륙의 문화는 독특하다. 물보다는 흙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지리적으로도 삼국의 각축지였던 까닭에 다른 지역보다 혼합문화가 많다. 크고 웅장하진 않아도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문화가 천지를 감싸고 있다.

내륙이 품고 있는 문화, 그 중에서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거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벗겨본다.

일제강점기 청주역(왼쪽), 1950년대 청주공고 운동장 (중앙), 1958년 전국자전차대회 장면.

청주는 내륙의 심장이다. 동쪽은 상당산과 우암산, 서쪽은 부모산과 팔봉산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분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가운데는 무심천이 남북으로 길게 흐른다. 전국에서 몇 안 되게 북에서 남이 아닌,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특이한 구조다.

청주는 백제 상당현, 통일신라 서원경, 고려 청주목을 거치면서 오랜 세월 중부지방의 맏형 역할을 했다. 특히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가 발달했다. 하지만 1911년 일제가 도시화 명목 아래 청주읍성을 파훼하고 급격한 산업화의 길을 걸으면서 성안길을 둘러싼 역사는 점차 뇌리 속에서 잊혀져갔다.

이 기간 특별한 기록화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 마땅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청주시가 얼마 전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성안길 토박이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 자료집을 펴냈다. 광복 전후와 6·25전쟁에서부터 본격적인 산업화 초기였던 1970년대에 이르는 시간 동안 청주 성안길이 겪어온 역사를 세세히 기록했다. 구성은 인터뷰 방식을 땄다.

이 책자를 타이머신 삼아 어느덧 전설이 돼 버린 옛 추억 속으로 떠나보도록 한다.

◇청주하면 무조건 청주뻬까리(이승우씨, 1931년생, 전 충북도 공무원)

- 중학교에 다니던 1944년 청주 성안길 얘기 좀 해주세요.

"4월29일이 일본 천황의 생일이야, 천장절이라고 그래. 소화천황의 생일이야. 청주베카리에서 만든 찹쌀 모찌, 찹쌀에다가 앙꼬(팥소)를 집어넣고 만든 거. 흰색 하나, 얇은 분홍색 하나, 두 개를 학교에서 나눠줘서 먹었어. 요새 말하면 축하 케이크라고.

청주베이카리, 일제시대에는 뻬까리, 청주뻬까리라고 불렀지, 그것이 청주약국 맞은 편이야. 일본사람의 제빵점인데 당시엔 엄청 유명했어.

- 또 기억나는 가게는요.

하까마다상회도 기억나네. 해방 후에 명문당 서점 및 문방구점으로 운영되던 곳이지. 학교에서 이름표를 적어주면 하까마다상회에서 국정교과서를 받아오곤 했는데 서로 새 책을 타려고 마라톤을 하곤 했지. 지금의 흥업백화점 자리에는 가끼하라상회라고 있었는데 자, 저울 같은 도량형기를 팔았어."

◇중앙교회 앞에 백두산 양복점, 무궁화 양복점(김재찬씨, 1933년생, 1950년대 홍콩 양복점 창업)

1960~1980년대 성안길에는 몇 집 건너 양복점과 양장점이 있을 정도로 맞춤복이 성업했다. 그러나 1980년대 접어들어 기성복 브랜드시장이 커지면서 문을 닫는 양복점과 양장점이 점점 늘어났다.

- 옷 스타일이 변천됐죠? 50년대, 60년대, 70년대.

"남자들 옷은 별 차이가 없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 입는 거 외에는 조금 나이 먹은 사람들은 카라가 넓고 얇고 차이지, 기본은 비슷해요."

- 구두는 티켓(상품권)이 있는데, 양복도 있었나요?

"티켓 있었지. 할인 티켓은 안하고. 그전엔 교육감, 지사, 교장 이런 사람들이 양복가격 하고 같이 해서 사갔어요. 10장, 20장 한다면 깎지만은 한 장, 두 장 할 때는 안 깎지. 나 할 적엔 최성열 교육감 그 사람이 많이 사갔어요."

- 홍콩 양복점 위치가 어디였나요.

"회춘당이라고 국제백화점 앞에 있었어요. 왜정 때 일본 사람이 하던 회춘당을 얻어서 한 거지. 그러다 기업은행 옆으로 집 지어가지고 이사를 했어요."

- 주변에 어떤 가게가 있었나요.

"바로 옆에가 후생사지, 맞은편이 천보당, 샤르뎅 의상실. 옆에 청미사, 국제백화점, 보성세탁소가 있었어요. 후에 세영전기가 들어왔죠."

◇제일교회 안에 있던 망선루를 교실로 써(민병인씨, 1940년생, 원로 연극인)

1960년대 청주지역의 자랑이었던 세광고 야구부.

1960년대 초 세광고 야구부는 졸업한 동문들이 경기장을 찾아가 응원할 정도로 학교와 지역사회의 자랑거리였다.

"그 때만 해도 세광고 야구가 아주 유명했지요. 내가 5회니깐 2회부터 야구부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데, 한 번 우승을 하고 이후에는 준우승 하고 그랬지요. 참 서울야구장 응원도 많이 갔어요. 졸업하고도 야구 붙는다면 부산까지 쫓아가 응원을 할 정도였다니까요."

- 세광고는 제일교회 기독교 학교였었잖아요? 학교의 특징이 있었을 거 같은데.

"현재는 중앙공원으로 옮겨진 망선루가 당시엔 제일교회 안에 있었어요. 망선루 칸을 막아서 1학년이 두 학급, 2학년이 두 학급을 썼지요. 제일교회 망선루에서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올라갈 때 대성동으로 학교가 이사를 가서 거기서 다녔어요."

1950년대 세광고 교사로 사용됐던 청주제일교회 안의 망선루는 조선시대 청주관아 시설로 만들어졌다가 일제 강점기에 청주제일교회로 옮겨졌다. 지금은 중앙공원으로 이전 복원됐다. 원래 위치는 청원군청 뒤쪽 CGV 북문 영화관 자리다.

◇"박군 빨리 가서 사진 찍어" 4·19혁명 데모 현장취재 (박영수, 1938년생, 1950년대 말 국어교사·전 청주문화원장)

1970년대 청주경찰서, 현재 CGV 영화관이 들어서 있다.

"청주대에 입학하면서 학보사 기자를 하게 됐는데 4학년 때 4·19가 일어났어요. 데모대가 지나갈 때 조용하기만한 거리에서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함께 구호를 외치더라고. 그 때 청주대 강당에 모인 500여 학생들이 3·15 부정선거 규탄 결의를 한 다음 교문을 박차고 가두행진을 시작하게 됐지요.

상의를 벗고 머리띠를 두른 데모대열은 학교 북쪽으로 난 상당로를 따라 내덕동 5거리(지금의 내덕7거리)까지 간 다음 되로 돌아 시내 쪽을 향해 걸어갔어. 청주대 정문을 지나 우암초등학교 앞에 이르자 경찰이 진을 치고 있는 거야. 길을 차단하고 최루탄과 소방차 호스로 물을 퍼부으며 데모대를 강제 해산시켰는데, 이 때 부상자가 많이 나왔어요. 간부 학생들은 경찰서로 잡혀갔는데, 훈방이 되자 다시 도청 앞 데모대에 합류해 시위를 했지요.

그 때 내가 취재한 것은 다소 진보적인 이정규 학장의 영향이 컸어요.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들고 데모대열을 갖추고 정문을 나서는 현장에서 학장님이 나보고 그러는 거야. 박군 빨리 가서 사진 찍어, 큰 소리로. 그 길로 나는 데모대열을 따라가며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한 취재를 마칠 수 있었지.

시민들의 호응도 참 뜨거웠어요. 청대신문에 기사가 나오고 4·19 희생자를 위한 모금운동이 시작됐는데 사흘 만에 162만환, 지금 돈으로 1억6천만원이 넘는 성금이 걷힐 정도였으니까요."

/ 임장규기자

자료 도움 =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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