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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아름다움 자태와 기교 - 광한루와 영남루

삼도 순찰사 정인지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 경관이 없더라"

  • 웹출고시간2013.11.24 18:06:35
  • 최종수정2013.11.24 18:06:35
춘향이와 이도령의 애환이 살아 있는 남원 광한루는 한국의 전통적인 누각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호남제일루라고 불리우는 광한루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다. 광한루에 걸린 편액에는 계관, 광한루라는 것이 있다.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인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의미한다.

광한루라는 편액은 신익성, 호남제일루라는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썼다고 기록돼 있다.

△ 춘향이와 이도령의 광한루

광한루

광한루는 조선 초기의 재상이었던 황희가 1418년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라고 불리우다 1434년(세종 16년)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하고 1444년 당시 전라관찰사였던 정인지에 의해 광한루라고 불리게 됐다.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순찰사였던 정인지가 광한루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오호라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은 나의 고향의경승을 감상하게 되면 나의 고향보다 나은 곳이 없고 더욱이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곳이 없더라 궁전 광한청허지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다'라고 감탄하면서 광한루로 불리웠다.

당시의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현재의 누각은 1626년 남원부사 인 신감이 복원했다.

1879년 광한루가 북쪽으로 기울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루의 북쪽에 다락(월랑)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 층층대는 1877년 부임한 남원부사 이용준이 광한루가 퇴락해 본관 전체가 기울어질 우려가 있자 수지면 고평리에 사는 추대목으로부터 조언을 듣고 북쪽에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고 아름드리 기둥을 세워 고정해 본관의 기울기를 바로잡았다고 전한다.

이 계단은 누각 건축사상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 누각에 월랑를 가설하게 된 시초라고 전해진다. 이전에는 사다리만 설치했었다.

광한루의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과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 만난다는 오작교를 설치했다. 오작교에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서로 통하게 돼 한국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로 알려져 있다.

소설 춘향전의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다.

춘향전에 대해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은 실존인물이다. 다만 성이 이씨가 아닌 성씨였다.

인조시대 호남 암행어사 성이성은 순천에 출두해 암행을 끝내고 남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눈보라가 심해 앞을 분별하기 힘든날씨에도 불구하고 광한루로 나갔다. 이곳에서 성이성은 늙은 기생 여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소년 시절을 생각하며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춘향은 1596년 4월8일 태어나 17세기에 사망한 광해군, 인조때의 실존인물이며 춘향의 연인 이도령 역시 본래이름은 성이성(1595~1664)으로 실존인물이다.

성이성은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부용당 성안의의 아들로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같은 또래의 기생 춘향을 사귀었다.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남원을 떠나야했다.

남원 광한루 안에 있는 성안의 부사의 송덕비는 이몽룡 실존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다. 당시 유교 양반사회의 특성상 양반과 기생의 사랑이야기가 광대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춘향전에서는 성이성을 이도령 이라는 인물로 바꾸었다. 춘향전은 춘향과 성이성 등 실존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고사나 설화가 가미돼 집필된 소설이다.

△ 세조에 반발한 조려선생의 채미정


채미정은 조선 단종 때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어계 조려 선생이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낸 정자다.

본래 건물은 1703년에 지었으며 현재 건물은 1902년에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채미정이라는 이름은 옛날 중국의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채미정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조선시대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면 현대로 복귀하는 기분이다. 채미정은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사각형 부지에 건물 한 채와 아치형 다리가 놓여 있는 연못이 있다.

이곳은 건물이 크거나 장식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 향기가 물씬 풍긴다. 오밀조밀하고 단단하게 꽉 찬 느낌을 준다.바로 옆 언덕에는 청풍대라는 낮은 언덕이 있고,그 위에 문풍루라는 육각형 정자가 서 있다.

지금은 채미정 앞으로 기차가 다니지만 조선 시대에는 온통 논과 밭 뿐이었다.

조려 선생 등 선비들은 농부들이 땀흘려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마음 편하게 한 세상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채미정 앞에는 서산서원이 있다. 서산서원은 조려 선생 외에 다른 생육신인 이맹전, 원호, 김시습, 남효은, 성담수 등의 위패를 봉안해 제향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1일과 9월 9일에 생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현재는 학생들의 예절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 퇴계를 사모하는 오연정

오연정

경남문화재자료 제215호로 지정된 오연정은 밀성 손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다.

조선시대 명종때 김제·울산 군수 등을 지낸 손영제(孫英濟)가 고향으로 돌아와 머물던 별서로 임진왜란과 1717년의 화재로 불탔다가 1771년 중건된 것을 1936년에 후손들이 확장·중건했다.

'ㄱ'자형 평면의 목조와가로 돌출부에 누마루가 설치되고 중앙의 2칸은 대청이며 양측에는 온돌방을 들였다. 재료의 마감, 건축재료의 비례, 건축방식 등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변형 없이 나타냈다.

뒷 부분에 있었다고 전하는 부속건물인 고직사는 'ㄷ'자형으로 본래는 정자에 부속된 살림채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순조(純祖) 때 사림(士林)이 경내에 묘례사(慕禮祠)라는 사당을 세웠는데, 고종 때 사당은 훼손되고 오연정만 남았다.

이곳에서 만난 그의 후손인 손병목(80)씨는 "불이 2번이 나 없어지고 이 건물은 1936년 지었다. 서당을 지을 때 모례서당이라고 지었다. 퇴계를 사모하는 의미로 불리었다"며 "모례사라는 사당터가 현재도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곳은 현재 관리인을 두고 관리를 하고 있다.

(경남 밀양시 교동 208)

영남루

'아랑의 전설'로 이름난 영남루

박정희

밀양문화해설사

아랑의 전설로 이름난 밀양의 영남루는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조선3대 누각중 하나다.

박정희 밀양문화해설사로부터 영남루에 대한 전설과 내력을 들어본다.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742~765) 당시 세워졌던 영남사가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것을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해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고 불렀다. 그후 조선 세조 5년(1459)에 밀양부사 강숙경이 규모를 확대했고 중종 37년(1542) 밀양부사 박세후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전란으로 소실됐다.

그후 인조 15년(1637) 밀양부사 심흥이 다시 중건했으나 현재의 건눌은 조선 현종 8년에 화재로 타버린 것을 2년 후인 1844년(현종10년)에 밀양부사 이인재가 재건했다.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군 객사인 밀주관에 부속된 누각으로 정면이 5칸, 측면이 4칸으로 기둥사이를 넓개 잡고 높은 기둥을 사용해 규모가 매우 웅장한 2층목조건물이다.

영남루라고 쓴 현판은 구한말 명필 하동주가 쓴 것이다.

영남루 경내에는 전설속의 인물인 아랑을 기리는 '아랑사'가 있는데 언제 건립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1878년 밀양부사로 재임한 신석균의 영남루 제영에 노승원과 열녀사라는 단편적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 지역주민들은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연민해 영남루 아래 대나무 숲에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의 아랑사는 1965년 밀양군민들과 향우들이 성금을 모으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향을 올릴 수 있는 사당으로 중건했다.

현재 모셔져 있는 아랑영정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밀양을 방문당시 김은호 화백에게 의뢰해 제작 하사한 것이다.

아랑과 관련된 전설은 아랑의 본명은 윤정옥(尹貞玉)으로 밀양 부사의 외동딸이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에게서 자란 미모의 처녀인 아랑은 음흉한 유모와 통인(지방관아의 심부름꾼) 백가가 흉계를 꾸며 어느날 밤 달구경 나온 아랑을 겁탈하려했다.

아랑은 통인에게 항거하다가 끝내 칼에 맞아 죽고 대숲에 버려졌다.

아버지인 밀양부사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다 함께 달아난 것으로 알고 벼슬을 사직하고 한양으로 떠났다.

이후 밀양으로 부인하는 부사마다 부임 첫날밤에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돼 밀양부사로 부임할 사람이 없게 된다.

이때 이상사라는 담이 큰 밀양부사가 자원해 부임했다. 부임 첫날밤 나타난 아랑의 원혼에게서 억울한 죽음을 들은 그는 한맺힌 원한을 풀어주기로 약속한다.

다음날 아침 이부사는 백가를 잡아 원수를 갚아주고 대밭에서 아랑의 시체를 찾아내 장사지내니 그후로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영남루 아래에는 아랑의 혼백에게 제사지내 온 아랑각이 있고 밀양아리랑도 영남루 비화에서 발생했다고 전한다.

영남루 야경은 밀양 8경중 하나이고 밀양강을 끌어안은 풍광은 아름다움 자체다. 누각의 처마끝, 눈을 감으면 시한수에 풍류를 즐겼을 성현들의 즐거움이 배어있는 듯 하다.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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