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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3.08.22 18:18:41
  • 최종수정2013.08.22 18:18:41

영동과 옥천지역에는 충북도내에서도 빼어날 정도의 정자가 위치해 있다. 금강변에 위치한 영동과 옥천은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진 정자는 탄성을 절로 불러오고 있다.

특히 한천정사는 송시열 선생과 관계가 있어 한천팔경으로 불리우는 절경과 어우러져 특이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금호루는 현재는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으나 당시 풍류를 아는 양반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를 얻었다.

한천정사

# 한천정사

한천정사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일컫는 아름다운 절경을 음미하면서 서재(書齋)를 짓고 글을 가르치던 곳이다.

한천팔경은 사군봉(使君峰), 월류봉(月留峰), 산양벽(山羊壁), 용연대(龍淵臺), 화헌악(花軒嶽), 청학굴(淸鶴窟), 법존암(法存庵), 냉천정(冷泉亭)으로 이름 붙여진 그 모양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에 앉아서 밤하늘에 뜬 달을 보고 있으면 사군봉에서 뜬 달이 냉천정까지 넘어가는 모양이 8개의 산봉우리를 타고 넘어간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절로 불러오고 있다.

후세에 우암 선생의 제사를 모시고 글을 가르치는 한천서원(寒泉書院)이 세워졌다가 고종 초에 철폐된 후 유림들이 1910년 한천정사를 건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천정사는 건축양식에서 옛 기법이 잘 유지되고 있으며, 소라천(召羅川)과 장교천(長橋川), 중화령(中化寧)의 물이 정자 앞에서 합류해 월류봉과 어울려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 때 사찰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석탑(石塔)의 부재(部材)가 일부 남아있다.

주민 이모(63)씨는 "한천정사는 마을주민과 황간면민들에게 향토문화를 사랑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며 "마을 주민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50)

# 금호루

영동·옥천 이남 하천의 근원이 양강을 이루어 한 호수를 뚫고 금강으로 흘러 이 호수를 금호(錦湖)라 부르면서 양산 8경을 이루고 있다.

하천의 절벽위에는 옛날 환선루(喚仙樓)가 있었는데 큰물에 허물어져 버렸다고 전한다. 그 후 이 고장의 선비 37명이 1938년 봄에 전북 무주에 있던 한풍루(寒風樓)를 옮겨다가 옛터 옆에 세웠으나, 1971년 무주의 반환요구에 따라 한풍루를 반환하고, 절벽위에 다시 지어 금호루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32.4㎡ 규모로 정면 3칸의 둥근기둥 목조기와 팔작집이다. 지금은 접근이 어려워 찾는 사람이 없으나 과거의 영화를 다시한번 느끼게 한다.

이모(45)씨는 "금호루까지 찾아가기에는 너무 멀지만 절벽위에 아련하게 보이는 금호루를 생각하면서 양산8경을 감상하는 재미는 더 없이 즐겁다"고 말했다.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 378)

이지당

# 옥천이지당

이지당은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중봉조헌(重峯趙憲)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서당(書堂)으로 처음에는 각신동이라는 마을앞에 있어 각신서당(覺新書堂)으라고 불리웠다.

이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시전(詩傳)에 있는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수 없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에서 끝의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이라 명명했다.

그 후 무너진 것을 1901년 광무(光武) 5년에 옥천읍 옥각리의 금(琴)씨, 이(李)씨, 조(趙)씨, 안(安)씨 네 문중에서 재건했다고 전한다.

건물의 구조는 목조기와 집으로 정면 7칸, 측면1칸의 팔작집으로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친필로 쓰신 '二止堂'이라는 편액과 중봉 조헌선생이 친필로 쓰신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앞에는 개천이 흐르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다.

자녀들과 이곳을 찾은 김덕신(36)씨는 "이처럼 아늑하고 좋은 곳에서 조상들이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며 "학교도 이곳처럼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면 학생들의 성적은 저절로 오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 33)

양신정

# 옥천 양신정

양신정은 금강변을 바라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았다. 이 곳은 전팽령(1480~1560)이 인종 원년인 1545년에 세운 정자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때 불타고 광해군 12년(1620년)에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영조 9년(1733)에 무너진 것을 순조 28년(1828)에 다시 지은 것으로 수많은 애환을 가지고 있다.

1978년에 보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집으로 '양신정기'가 전해온다.

전팽령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숙노, 호는 송정이며 본관은 옥천이다.

연산군 10년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중종 19년(1524)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가지 벼슬을 거쳐 외직으로 단천군수와 삼척과 밀양부사를 지냈다.

양신정은 밀양부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독서를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명종 5년(1550)에 상주 목사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벼슬은 가선대부, 부호군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작은 정자지만 운치가 있고 한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는 온돌 시설이 있다.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충북도 기념물 29호)

호서루

# 호서루

영동군 향토유적 37호인 호서루는 조선시대 읍청 박사종(朴嗣宗)이 호호정(浩浩亭)을 심천면 약목리 장승산(長承山)에 지어 마산정(馬山亭)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이후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밀양박씨 종중에서 1959년 이곳에 다시 짓고, 호서루로 이름을 바꿨으며, 금탄(錦灘) 박시호(朴時浩)가 기문(記文)을 지었다.

모양은 둥근기둥의 목조기와 2층 누각으로 99.2㎡(30평)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주민 김인성(45)씨는 "호서루는 예전에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며 "지금은 찾는사람들이 별로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산 1-1)

세심정

# 세심정

영동군 향토유적 19호인 세심정은 조선 중종조에 삼괴당 남지언 선생이 기묘사화에 시국을 비관하고 일생을 은거할 당시 지었다.

남지언 선생은 성심껏 수도하고 덕행을 친히 숭상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과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아는 선비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학문과 덕을 숭상하고 도리를 배우는데 일생을 바치며 벼슬을 버리고 숨어사는 선비들의 뛰어난 행실과 높은 절개를 본받아 이어가라는 의미에서 세심정이라 이름지었다.

기초 암벽에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음각 글귀가 있어 선생의 덕행을 나타내고 있으며, 후면 바위에는 고성남씨 세거지 라는 음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구조는 둥근기둥 목조기와 단층 6각정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이곳을 찾았다는 구모(39)씨는 "세심정이라는 이름이 너무 좋아 아이들과 함께 정자에 올라 마을을 둘러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며 "이 마을 주민들이 순박한 것이 세심정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 43-1)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발전신문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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