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사흘째를 맞은 가운데, 그가 생전 애창곡으로 뽑은 '울고넘는 박달재'의 노랫말이 묘하게도 새삼 격랑 가득했던 그의 생을 대변하는 것 같아 '화제'가 되고 있다.
전 대통령의 애창곡은 사실 '을고넘는 박달재'만이 아니다. 대권 후보 시절 직접 기타를 치며 양희은의 ‘상록수’를 부르기도 했고 한때는 '작은 연인들'을 애창곡이라고 소개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004년 10월 충북 제천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지역 민심을 겨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울고넘는 박달재'를 그의 '18번'으로 꼽으면서 노 전 대통령 애창곡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박달재는 1217년 7월 거란군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해 왔을 때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전공을 세운 전승지로 유명하며 제천에 위치해있다.
'울고넘는 박달재'는 대한민국 건국 직후인 1948년 박재홍이 불러 큰 인기를 모은 트로트곡으로, 작사가인 반야월이 악극단 지방순회 공연 중 부부로 보이는 남녀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지은 노래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념에 찬, 그러나 굴곡진 정치인생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은 1절 중에서도 후반 부분.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그리고 2절 중반부는 36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한 권양숙 여사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라는 구절은 더욱 구슬프게만 들린다.
말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학창시절 내내 1-2등을 놓치지 않고도 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유년의 설움.
7년간의 피나는 노력끝에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으나, 1년도 채 안돼 법복을 벗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그럼으로써 우리사회 모순과 위선에 정면으로 맞선 청년의 고통.
서슬 퍼른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과 그 이후 정부 각료들의 부정부패를 꼬집으며 한 번도 쉽고 편한 길을 택하지 않은 장년까지 이어진 소신의 삶.
그리고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내가 파격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만큼 타성에 젖었다"며 소통과 개혁을 부르짖었던 노무현.
이 모든 외롭고도 힘겨운 시간을 끝내고, 고향 봉하마을에 도착해 "야~ 기분좋다!"를 외치며 감개무량해 했던 노 전 대통령은 '보통사람'의로서 삶을 불과 채 세 달을 못 채우고 '스무 길 아래 바위덩이에 온 몸을 때려(유시민 친필편지 일부)' 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
기사제공: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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