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립미술관, 그 후

2016.07.07 17:53:19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창조경제팀장

수평선 너머의 세상이 항상 그리웠다. 번잡한 일상에서 탈출해 이웃의 이야기를 엿듣고 싶고 낯선 무대의 속살을 훔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읽고 여행을 즐기며 사색의 우물을 파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 곳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와 경험,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문화적 충격을 한 줄 한 줄 기록하고 사진으로 담으며 책으로 펴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위에서 그르렁거리듯이 책을 잠시라도 멀리하면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로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그때마다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사거나 서재에 있는 책장을 두리번거려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책을 읽는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속에서 생각이 넓어지고 자아가 성숙되며 똘레랑스(관용)와 노마디즘(인식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여행은 활자 밖의 세상풍경을 온 몸으로 맞이하는 일이다. 이름 모를 도시 골목에서 까치발을 하면 새로운 세상이 나를 설레게 했다. 도시를 대표하는 박물관·미술관 탐방은 여행의 백미다. 여기에 그 도시가 자랑하는 음식을 곁들이면 말 그대로 황홀한 여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파리의 르부르박물관과 오르세미술관, 런던의 데이트모던, 뉴욕의 현대미술관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허기졌던 가슴이 꽉 찬 느낌에 흥분하곤 했다.

벨기에 브뤼셀에는 80여 개의 크고 작은 미술관이 있다. 100만 명 남짓한 이 도시는 발 닿는 곳마다 역사의 숨결과 예술의 향기로 가득하다. 초기 플랑드르 회화에서 현대미술 작품까지 골고루 갖춘 브뤼셀 왕립미술관과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마그리트 미술관 등 온갖 미술로 성찬을 이루고 있으니 눈과 마음이 호사한다. 예술은 인간의 생존과는 거리가 먼 소모적인 행위일 수 있지만 인간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이 아니던가.

주말에는 딸들과 함께 청주시립미술관 개관전에 다녀왔다. 오랫동안 기다려왔기에 가슴 설렘을 안고 달려갔던 것이다. '여백의 신화'를 주제로 한 개관전은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 온 청주출신 근대작가의 불꽃같은 삶과 예술혼을 소개했다. 근대 조각의 선구자 김복진, 현대추상회화의 지평을 연 정창섭·윤형근, 자연의 미·생명의 미를 통해 삶과 존재의 이유를 표현한 김봉구, 동양화 전통의 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박노수, 근대 산수화의 전설 김기창과 그의 아내이자 한국화의 새로운 도전을 서슴지 않았던 박래현 등 7인의 작가 회고전을 통해 청주의 미술사를 읽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기우(杞憂)도 없지 않았다. 40여 년에 걸쳐 청주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전파했던 방송국을 리모델링한 곳임에도 역사적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공간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지고 사랑도 사라진다고 했는데, 폐공간의 문화재생적인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특화된 미술관의 위상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와 지역 미술인들이 마음껏 희망하는 공간으로 가꾸는 노력도 필요하다.

개관전에는 작고 미술인 7인전을 했으니 앞으로는 청주를 빛내고 있는 현존 미술인 특별전과 릴레이전을 해야 할 것이고, 세계와 소통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시도 해야 할 것이다. 보리작가 박영대 화백처럼 평생을 미술세계에 몸담아 온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만드는 일과 젊은 아티스트를 키우는 노력도 경주해야 할 일이다.

시립미술관만 있으면 안된다. 시립박물관, 시립문학관도 서둘러 만들어져야 한다. 인간의 이성여행은 문사철(文史哲)이고 감성여행은 시서화(詩書畵)다.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 문화예술로 풍요로운 도시로 발전시키려면 시립박물관, 시립미술관, 시립문학관 3종세트가 완성되어야 한다. 청주가 자랑스럽다는 것은 세상에 알리고 그 가치를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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