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로그시티 청주

2015.02.05 14:59:40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나를 움직이는 연료는 침묵이요/나의 엔진은 바람이요/나의 경적은 휘파람이다/나는 아우토반의 욕망을 갖지 않았으므로/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하여 목적지로부터 자유롭다/나는 아무것도 목표하지 않는다/목표하지 않기에 보다 많은 길들을/에둘러 음미한다/…/나의 시간은 무한한 곡선,/은륜의 텅 빈 내부로 물이 고이듯 시간이 머문다"(유하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중에서)

찬바람이 일렁이는 새벽 산행길에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시가 있다. 아우토반의 욕망에 취해 무한질주만을 일삼아 온 도시 사람들에게 자연은 언제나 정직하고 소소한 풍경을 만들어 준다. 산과 바다로 떠나는 나그네의 뒤태가 아름다운 것도 잠시나마 버릴 줄 알고, 음미할 줄 아는 길 위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이 청주를 생명의 도시, 디지로그의 도시로 만들고 싶다는 화두를 던졌을 때 세상 사름들은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다. 청주를 대표하는 브랜드와 콘텐츠가 애매하고, 도시의 풍경도 주변 도시와 별 반 다를 것이 없다며 체념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통합시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조하고 특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높았지 할거주의나 이슈만 난무할 뿐 명쾌한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어령은 때묻지 않은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도시, 2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와 교육문화의 도시, 바이오와 도농복합 도시라는 청주만의 특성 속에 비밀의 열쇠가 있다고 했다. 역사와 자연과 생명을 중심으로 한 아날로그적 콘텐츠, 그리고 직지의 창조적 가치와 교육문화 환경을 연계한 디지털 콘텐츠가 조화를 이루는 세계 유일의 디지로그시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령은 이미 10여 년 전에 '디지로그'를 주창했다. 한국인이 이끄는 첨단정보사회, 그 미래를 읽는 키워드가 바로 디지로그라는 것이다. 왜 디지로그인가. 한국은 IT 기술의 인프라와 융통성 넘치는 사회 분위기, 창의와 집념과 신바람의 DNA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IT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IT 강국이라고 해서 행복한 나라일 수는 없다. 경직된 조직, 획일화된 문화, 자본 중심의 사회…. 게다가 정보화 사회로 진입할수록 인간의 욕망과 번잡한 도시적 삶 때문에 몸과 마음 모두 피폐화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경계했다.

그래서 이어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융합된 '디지로그'의 세상을 제안했다. '디지로그'는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지털 기술의 부작용과 단점을 보완하고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 일으켜 전통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미래를 표현하는 말이다. 생명의 가치, 관계의 연속성, 개개인의 삶과 문화의 특성화, 자연과 첨단의 융합을 통해 미래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산과 들과 강과 골목길 구석구석을 역사와 생태와 문화와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는 아날로그적 환경을 만드는 일부터 해야 한다. 인공의 잣대와 행정의 논리가 아니라 자연과 시민과 예술의 가치로 공간의 특성을 살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을 여행하거나 오가는 사람들이 디지털 기법으로 향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예컨대 상당산성을 투어할 때는 산성의 이야기와 음악을 IT 기술로 즐길 수 있도록 하고, 가로수길을 지날 때는 아름다운 풍경과 영상이 눈앞에 신비롭게 연출되는 것이다. 쇼윈도에 있는 세계 최고의 명품을 핸드폰으로 클릭하면 택배로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 쇼핑을 위해 공들여야 했던 시간을 아껴 대지의 여행을 떠나거나 문화적인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감성의 숲에서 놀고, 예술의 바다를 항해하며, 문명의 가치를 향유하는 날을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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