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양산팔경의 비밀

2015.09.03 13:47:13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물은 선하고 맑고 향기롭다. 달콤한 행복이자 고단한 삶 속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며 영원한 청춘이고 사랑이다. 땅 속 깊은 오지에서 젖 먹던 힘을 다해 용솟음칠 때는 하늘보다 더 크다. 우주다, 태양이다. 그리하여 물은 계곡을 따라 폭포수가 되고 처연한 이별이자 지저귀는 산새소리처럼 숲속의 악동이다.

누가 그랬던가. 나이테는 나무가 만들어 낸 역사이고, 나무껍질은 나무가 겪어내는 고난의 무늬라고. 어린 소나무는 껍질이 가볍지만 오래된 소나무는 두텁고 강하며 질기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애국가처럼 한국인의 고단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 가을볕이 뜨겁고, 온 생명이 알곡지다. 여름을 견디고, 아픔을 견디고, 욕망과 아집을 견디고, 불면의 밤을 견뎌야 달콤한 열매를 준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눈을 뜰 것이다. 사랑이란 견디는 것이라고, 꽃처럼 바람처럼 햇살처럼 나비처럼 그렇게 견디며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 줄 것이다.

고샅길을 걷다보면 모든 욕망이 덧없어진다. 신화와 전설이 켜켜이 쌓여있는 길, 돌담과 흙담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의 구릿빛 풍경, 장독대에서 구순한 장내가 끼쳐오고 느티나무 정자에 앉아 노래하는 소녀들과 빨래하는 여인과 개짓는 낯선 풍경도 오달지고 마뜩하다. 만화방창 꽃이 만발하고 녹음 우거지고 열매 가득하며 다시 비우고 하얀 눈발 휘날리는 고샅길은 정처 없다. 풋풋하고 구순하다. 이 길을 걷다보면 어느 새 욕망의 옷을 벗고 맑은 햇살, 한 줌의 흙처럼 자유의 몸이 된다.

영동 양산팔경은 이처럼 물과 숲과 고샅길의 풍경이 처처에 담겨있다. 숲과 계곡과 천년의 신비와 곡진한 삶의 염원을 간직하고 있는 영국사, 물길을 품고 우뚝 서 있는 절벽에 붉게 빛나는 소나무와 정자와 조선의 시노래가 담겨있는 강선대, 낮은 산이지만 고샅길 마을의 수많은 이야기를 품으며 드넓은 평야를 굽어보는 비봉산, 봉황이 깃들던 곳이라 해서 이름 지어진 봉황대를 보라.

선비들이 시를 읊고 글을 쓰며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알려진 함벽정, 진한 솔향 가득하고 햇살과 바람도 잠시 쉬어가는 송호관광지와 조선시대 연안부사를 지낸 만취당 박응종이 낙향해 즐겼던 여의정, 대자연을 품으며 학문에 정진했던 자풍서당,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용암은 또 어떠한가. 양산팔경을 한 바퀴 돌고나니 시간은 어느새 과거에 머물고 알 수 없는 한바탕 꿈속의 잔치는 나를 먹먹하게 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비봉산이 있는 가곡리가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오래된 고택과 낮고 느린 골목길 풍경이 한유롭다. 낡고 병든 지붕과 아슬아슬한 담벼락을 보며 가뭇없이 사라진 옛 생각에 젖는다. 방앗간에서는 기름 짜는 고소한 풍경이 밀려오고 여러 개의 낡은 농협창고가 예사롭지 않다. 1910년 조양학당으로 시작해 1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양산초등학교를 들어가니 옛 것의 풍경과 오늘의 이야기와 풍금소리에 맞춰 노래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선하다.

고종황제 어의였던 변석홍 선생이 일제 침략이 시작되자 이곳에 낙향해 의술을 가르치고 생명의 가치를 전파했던 제월당은 아름다운 정원과 한방의 풍경과 역사의 맥이 엄연하다. 말의 무덤으로 전해오는 석실분이 있고, 다방과 성당과 교회와 약수터를 지날 때마다 시심에 젖는다.

그리하여 이곳은 생명문화를 간직한 스토리텔링마을이다. 공간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지고 사랑도 사라진다. 이곳은 역사와 자연, 농경문화와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영광과 아픔과 상처와 생명의 염원이 깃든 곳이다. 이곳만의 문화를 잘 다듬고 가꾸어 준다면 세상의 보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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