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선물

2016.01.21 14:24:30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문득 이불을 개며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창조한 최초의 날, 내가 살아온 날 중 가장 아름다운 날, 그래서 내가 살아야 하는 날, 살고 싶은 날, 눈을 떠야 하는 날…." 지난해 크리스마스 날 천주교 세례를 받을 때 지은 졸시(拙詩) '이불을 개며'의 일부분이다.

하루 하루가 이처럼 새롭고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날이자 최초의 날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해가 바뀐다는 것은 낡고 고루한 삶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새 날을 준비하는 처녀성이 있어 좋다. 새 해 인사를 나누며, 새로운 꿈을 향해 출발하는 신선함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건조하지 않을까.

그래서 연초에 이어령 선생님을 뵙고 문안 올리며 가슴 떨리는 말씀의 성찬을 함께했다. 마침 지난해 말 서울의 한 병원에서 당신의 아픔을 보고 하산하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으며, 지역의 작가가 맡겨놓은 선물도 전달해야 했기에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갔다.

박영대 화백은 네 폭짜리 보리작품을 보내왔다. 이어령의 '생명문화론'에 맞춰 동아시아문화도시 개막식에서부터 젓가락페스티벌 등 다양한 행사에 박 화백의 청맥과 황맥 시리즈가 무대를 장식한 바 있다. 박 화백의 작품을 보며 '보릿고개 넘어 생명문화도시로'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박 화백은 이어령의 열정과 헌신을 보리의 진한 생명력으로 표현했다. 평생 붓만 만들어 온 유필무 작가는 붓세트를 준비했다. KBS 특집 프로그램 '이어령의 100년 서재' 10화 '젓가락과 생명문화'에서 '생명공감'이라는 시를 소개했는데 작가는 이 시를 붓에 새겼다. 평생을 인문학의 최전선에서 책과 함께, 글과 함께 다투어 오셨으니 붓은 또 다른 사유의 공간이 되지 않을까.

일본의 국제젓가락문화협회 우라타니 효우고 회장은 건강을 기원한다며 기도로 빚은 그 무엇을 보내왔다. 젓가락페스티벌 직후 당신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로 몇 날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일본인 중에는 이처럼 한국인 이어령을 존경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인보다도 더 많은 일본문화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새로운 문화가치를 심어주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현하면서 말이다.

의도되지 않은 선물에 이어령은 고맙고 감사하다며 당신이 준비중인 연구소 자료실에 소중하게 전시키로 했다. 청주시민은 동아시아문화도시의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개막식을 비롯해 젓가락페스티벌, 창조학교 등 50개가 넘는 교류사업을 펼치고, 그 때마다 시민들의 참여와 협력과 열정의 가치를 직접 확인했다며 청주를 대표하는 최고의 자산은 곧 시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새 해 첫 번째로 출간한 책 '지(知)의 최전선'을 한 권씩 선물했다. 10년 전에 디지로그를 통해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예언했는데, 이 책은 침몰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생명문화의 가치, 지식과 정보와 지혜의 조화를 통한 위대한 창조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왜 청주가 생명문화도시인지, 직지의 가치를 어떻게 발전시켜 할 것인지를 명쾌한 화법으로 제시하고 있으니 그 설렘을 말해 무엇하랴.

선생님께서는 말의 성찬을 이어갔다. 급변하는 세상, 전쟁터 같은 국제정세에서 살아남는 길은 융합의 가치, 창조의 가치, 감성의 가치를 살리는 길 뿐이라며 한국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사회적으로 갈등과 대립과 혼란의 연속인 작금의 태도를 우려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희망, 청년의 희망, 기업의 희망, 지역의 희망, 농촌의 희망이 무엇인지를 웅변했다. 선생님의 말의 성찬 역시 내겐 소중한 선물이 아니던가. 벽두부터 가슴이 떨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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