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韓紙), 그 매력 속으로

2015.09.17 13:25:24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고려 말 이첨(李詹)이 지은 가전체 소설 '저생전'은 종이를 의인화해서 위정자들에게 올바른 정치를 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고, 종이로 책을 찍어내 읽으며 학문정진과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물욕에 물들지 않고 바른 삶과 정치를 하자며 응변하고 있는데 종이의 역사와 가치 등을 의인화 한 것이니 공방전, 국선생전, 청강사자현부전 등과 함께 우리나라 가전문학의 걸작이다.

문학을 전공했지만 설렁설렁 놀며 배웠기 때문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동아시아문화도시 이어령 명예위원장이 느닷없이 '저생전'을 꺼내면서 한지 작가를 찾아달라고 했다. 한지작가라면 두 말 할 것 없이 벌랏마을의 이종국 씨가 아니던가. 닥나무와 닥풀을 직접 재배하고 한지를 만들며 다양한 문화상품과 예술작품까지 만들고 있는 사람이니 머뭇거림 없이 추천했다.

늘 그랬다. 당신은 나를 만날 때마다 무디어진 지식의 촉수를 깨우고 새로운 상상의 날개를 펴도록 했다. 청주가 생명의 모항(母港)인 근원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도, 고려 가요 '동동'의 분디나무를 찾아보라고 했을 때도, 세살마을이나 창조학교와 관련된 콘텐츠를 이야기 할 때도 나는 앙가슴 뛰는 설렘으로 연결고리를 찾고 새로운 문화가치를 만들어내곤 했다.

저생전이 인연이 돼 벌랏마을 이종국 작가와 이어령 명예위원장이 만났을 때의 화두는 세계 최초로 책나무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닥나무와 닥풀을 이용해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는 한지를 만들고, 이 한지로 지식과 지혜를 담는 책을 만들지 않았던가. 이 책이 다시 나무가 되고 한지로 재생산되는 생명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책의 맨 뒷부분에 닥나무와 닥풀씨앗을 넣어 출판한 뒤 다 읽은 독자들이 씨앗페이지를 가지고 와서 심으면 책의 숲이 되고 생명의 보금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책 한 권이 출간될 때마다 책나무숲이 하나씩 생겨날 것이다. 괴테의 숲, 보들레르의 숲, 이어령의 숲, 변광섭의 숲…. 그 때마다 저자와 독자가 만나 이야기 꽃을 피우고, 감동과 감성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 숲이 우거지면 나무를 수확해 종이를 만들 것이고, 그 종이를 활용해 또 다른 책을 만들 것이다. 작가와 출판사, 정부와 지자체, 장인과 주민들이 힘을 모으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책문화, 생명문화 콘텐츠로 탄생하지 않을까.

이어령 명예위원장은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간다. 프랑스인들은 한국의 종이와 도자기를 좋아하는데 내년에 한불수교 5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에 책나무공원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마침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를 비롯해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프랑스에 가 있으니 책나무프로젝트를 통해 문화적 우월성과 새로운 미래를 선도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청주일원에 한지의 매력공간을 만들면 좋겠다. 닥나무종이학교와 한지디자인센터를 만들어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문화상품을 만들자. 닥나무를 활용해 떡과 음식을 만들어 특성화하고 한지로 만든 책에서부터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콘텐츠를 창조하자. 닥나무종이축제를 통해 우리 고유의 삶과 멋을 알리고, 지천년견오백의 의미를 되새기며, 숲속의 악동과 생명문화의 어울림을 노래하면 좋겠다.

세상은 변화와 순환의 아름다움이 존재하지만 우리네 삶의 신화가 모두 사라지면 수천 년 가꿔온 문명도 사라질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돌아가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한 종지 꿈을 일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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