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흔들 콘텐츠를 찾아라

2016.02.18 13:35:55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동아시아문화도시,공예디자인창조벨트사업단 총괄코디

길을 나서는 것은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일이며 내 마음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마른 숲에 눈보라 휘날리면 내 마음에도 잔설이 내리고 벌거벗은 나목을 바라보면 견딤의 미학에 절로 숙연해진다. 골목길의 연탄재 하나에도 비밀이 숨겨있을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바람이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눈물을 토할 것 같은 날이 있다. 이 때 만나는 낯선 풍경과 다양한 삶의 양식은 기진했던 내 마음을 유순하게 하지 않던가.

딸들과 함께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과 문인인장박물관으로 마실 다녀왔다. 추사고택은 책과 붓을 평생의 동지로 생각하고 실사구시를 실천해 온 추사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사당채 곳곳에 추사의 절개와 예술의 깊이가 느껴진다. 백송 한 그루가 나무네 발목을 잡는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의 노송과 유사하니 추사는 소나무를 보며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피를 토했을 게다. 한 일(一) 자를 십 년 쓰면 붓끝에서 강물이 흐른다고 했는데, 추사의 붓끝에는 어떤 강물이 흐르는지 궁금했다.

이같은 나의 궁금증은 추사고택의 주련이 해갈해 주었다. 주련은 북풍한설에도 꼿꼿하게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속에 5천 개의 문자가 있어야 붓을 들 수 있다." "천하에 제일가는 사람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두 가지 큰 일은 밭 갈고 독서하는 것이다." 추사의 메시지가 내 삶의 노둣돌이 되면 좋겠다.

문인인장박물관은 문호들의 숨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소설가·수필가·시인·교육자인 이재인 관장이 평생을 수집해온 문인들의 인장 2천여 개가 전시돼 있다. 이재인 관장은 나의 중학교 스승이다. 내 청춘은 당신의 감성적인 문학관과 불꽃같은 열정과 부지런한 삶의 노정을 그대로 본받고자 했다. 우리나라 유일의 인장박물관을 운영하는 것도 당신 특유의 부지런함과 열정과 문학에 대한 사랑의 결실이다.

활판인쇄로 책을 만들던 시대에는 책의 맨 뒷장에 작가의 도장이 찍혀있는 인장표가를 붙였다. 몇 권을 찍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가와 출판사와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인장표와 비슷한 것이 장서표다. 장서표는 작가의 개성미를 표현하고 있는데 고은 시인은 수탉, 안도현 시인은 귀신고래, 한비야는 지구본 위를 걷는 발을 통해 자신들의 글밭을 상징화하고 있다. 장서표는 원래 책 주인을 표시하고 책을 장식하는 용도로 쓰였던 것인데 컴퓨터 인쇄가 보편화되면서 인장표는 사라졌고, 장서표는 간간이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박두진·조지훈 등의 인장을 비롯해 김동리·서정주·오영수 등 국내 대표적인 문인들의 인장이 망라돼 있다. '막도장'이라는 것에서부터 원형인장, 사각인장, 조형미와 회화성을 갖춘 인장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디자인과 크기가 다양하다. 영조 등 조선시대 옥새와 구한말 김홍집이 쓰던 내각인장 등 희귀품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이어령 선생의 인장을 기증받았고 대학로 예총회관의 쓰레기통에서 유치진 시인의 낙관을 발견했다.

이 많은 인장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까. 인장을 얻기 위해 문인들의 집을 문턱 닳도록 드나들며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부지런함의 결실이다. 당연히 인장을 구하며 생긴 에피소드만 해도 한 권의 책으로 나올 법하고, 문인들의 인장마다 담긴 흥미롭고 감동적인 스토리텔링 또한 무진장 많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는데, 유연한 사고와 창조의 가치와 실천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구인 젓가락을 통해 확인했듯이 문인들의 인장과 장서표 속에도 새로운 가능성의 확장과 창조의 내음이 끼쳐온다. 우리 동네에도 세상을 흔들만한 작은 아이콘이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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