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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본 우리 문화재 - 조선시대 달력문화

"2년전 제작 시작…5-6가구당 1부씩 보급"
국가 행사 외에 농사용으로도 반드시 필요
사전유출 방지위해 4그룹이 1계절씩 맡아
보급 시작은 중국보다 보름늦은 10월 망일

  • 웹출고시간2011.12.19 18:36:5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달력(曆書)이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6~7세기 무렵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14년(674) 정월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던 대나마(大奈麻) 덕복(德福)이 역학(曆學)을 배워 돌아와서 새로운 역법으로 개용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보다 앞서 중국 역서가 백제를 거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내용이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역박사 왕보손(王保孫)이 554년(위덕왕 1) 일본에 건너갔으며, 또 602년(무왕 1)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이 역서를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관련 조선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이라는 곳에서 역서를 제작·보급했다. 당시는 어떤 과정을 거쳐 달력을 만들었고, 또 몇 부 가량 보급했을까.


충북대 기초교육원 박권수 교수의 논문 '조선시대 역서의 간행과 배포' 논문에 따르면 역서 제작은 대략 22~25명의 전문가로 팀을 구성, 보통 2년 전부터 시작했다.

이를 흐름도로 작성하면, 역계산 시작-역계산 결과 제출-인출 시작-인쇄 완료-역서배포 시작-역사 사용 등의 과정을 거친다.

'古今通考'라는 18세기 역서로, 절기 이름(선)이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동일집단이 12개월 모두를 계산하거나 인쇄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전에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대신 24명의 4그룹으로 나눠, 봄·여름·가을·겨울 중 하나의 계절을 맡았다.

배포는 임금에게 먼저 진상을 한 후 10월 망일(15일)부터 시작했다. 날짜가 유독 10월 망일인 것은 중국의 배포일이 10월 초하루였기 때문이었다.

배포는 관리가 주변 사람이나 민간인에게 선물을 주는 형식으로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하선동력'(夏扇冬曆)의 풍습이 존재했다. 이는 단오에 부채, 동짓날에 달력을 선물로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관리가 선물하는 방법만으로는 물량이 달렸기 때문에 이른바 '관상감 사건'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는 관상감이 자비를 들여 역서를 추가로 인쇄, 유상판매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당시 조정은 종이값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이를 용인했다.

조선시대 역서 배포량은 전기와 후기에 있어 큰 차이가 났다. 사료 '서운관지'(書雲觀志)(1818)를 조사한 결과, 조선전기에는 연간 5천부 가량이 배포됐다.

그러나 후기인 1762년에 20만부, 1791년에는 30만부를 돌파했고, 1798년에는 38만부까지 배포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대략 22~25명당 1부, 그리고 호구수로는 5~6가구당 1부씩 배포된 셈이 되고 있다.

'庚辰年大統曆'이라는 조선전기의 유일한 역서로, 보물 1319호로 지정돼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역서는 의외로 보급량이 많은 편이었다. 이는 역서가 국가행사나 각 가정의 제사 외에 농사용으로도 매우 긴요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역서는 흔했던 만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빨리 훼손돼 현존하는 역서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역서는 경진년대통력 (庚辰年大統曆) 이 유일, 헌재 보물 제 1319호로 지정돼 있다. 경진년 대통력은 모두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은 정월에서 12월까지 윤4월을 포함한 13개월의 24절기에 관한 내용과 연신방위지도, 제 2장∼제14장은 책력의 본체인 1월에서 12월까지의 월력이다.

달력에는 날짜별로 일상생활에서 그날그날 하기에 좋은 일과 해서는 좋지 않은 일을 기록해 놓았다. 마지막 제15장은 부록격으로, 간지별로 피해야 할 일들을 열거한 부분과 이 책력의 편찬·인쇄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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