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거진천' 문백에 묻힌 두 명인

2021.03.10 16:17:28

이재준

역사칼럼니스트

진천을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고 한다. 그 다음 말이 사거용인(死去龍仁)이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에 묻혔다'는 옛날 한 아낙네의 설화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진천군 문백면에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두 분의 묘소가 있다. 한 분은 조선 최고의 가사문학가인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고 한 분은 시, 서, 화 삼절로 불리는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이다.

필자는 송강의 묘소가 문백에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표암의 묘소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두 명인이 고향에 묻히지 않고 문백 땅에 묻힌 것을 생각할 때 '생거진천이요 사거진천'이란 말을 붙여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본래 송강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공릉천변에 있었다. 그런데 숙종 대 재상 우암 송시열이 묘소를 진천으로 이장했다. 물론 당시 진천 문백에는 연일 정씨 송강의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우암의 도움으로 이전을 추진했던 것 같다.

고양시 송강의 묘소가 있던 곳을 가면 한 기녀(妓女)의 묘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송강이 사랑했던 남원 기생 강아(江娥)의 무덤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송강이 전라감사로 부임해서다. 남원에서 강아를 만난 송강은 그녀의 음악과 아름다움에 머리를 얹혀주었다.

송강은 강아를 사랑하여 시간만 있으면 전주에서 남원으로 달려갔다. 본래 이름은 진옥(眞玉)이었으나 송강이 자신의 아호 강(江)자를 따 강아라고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송강이 강계(江界)에 유배 될 때도 이어진다. 기생이 여장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강아는 남장을 하고 송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위로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랑하는 님이 병이 걸리자 여인은 남원에서 머나 먼 고양시 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송강이 임종을 거두자 묘에 쓰러져 식음을 전폐하고 목숨을 끊었다. 여인이 송강의 무덤 앞에 쓰러져 죽자 유족들은 그 녀가 송강이 사랑했던 강아임을 알고 묘소 옆에 안장했다. 후손들은 그녀를 의기(義妓)라고 예우해 주었다.

우암이 선학 송강의 묘소를 이전하면서 강아의 묘는 그대로 두었다. 생전에 그토록 옆에 묻히고 싶었던 님을 또 잃은 강아. 고양의 강아 무덤은 이렇게 홀로 남게 된 것이다.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은 조선 정조 때 사대부로 본래 경기도 안산에서 살았다. 표암이 유명한 것은 바로 위대 한 화가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라는 점이다. 경기도 안산 처가에서 낙향하여 살던 표암은 어머니 손을 잡고 온 일곱 살 총명한 단원을 만나 스승이 되었다.

스승을 수발하며 수학한 단원은 18세에 표암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단원이 반듯한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표암의 영향이다. 단원은 23세에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도화서 화원이 되기까지 성장을 풍속화로 남겼는데, 이 그림에 표암의 유유자적한 모습도 보인다.

만년에 단원은 스승을 모시고 강원도 보은(報恩)유람을 떠난다. 스승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금강산을 사은으로 보답해드리기 위함이다. 단원은 이 여행에서 명작인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70폭을 완성했다.

진천군이 문백 땅에 묻힌 위대한 문인 송강과 강암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행사라도 매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덧 붙여 의기 강아의 묘소를 송강 곁으로 이장하는 문제도 논의 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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