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없다'는 초정 행궁

2020.05.27 16:41:31

이재준

역사칼럼니스트

 세종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추앙 받는다. 가장 큰 업적은 아무래도 한글 창제일 것이다.

 세종이 없었다면, 아니 신하들의 극간과 저항에 굴복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우리민족은 언어도 없는 미개민족으로 현대에 와서도 중국에 의존하는 나라가 됐을 게다.

 세종은 충북출신 신료들을 유독 신임했다.

 한글창제의 최고 공로자로 꼽히는 신미대사(信眉大師)와는 매우 가까웠다. 세종은 세상을 떠나면서 세자에게 유명으로 신미에게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로 존호할 것을 당부했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숭유억불이 시대적 사조였던 시기, 세종은 신하들의 벌떼 같은 반대에도 왜 신미를 최고의 국사로 추앙한 것인가. 승려에게 이 보다 더 높은 칭호를 내린 적이 없었다.

 신미대사는 영산 김씨로 영동에서 태어난 고승이다. 친동생인 괴외 김수온(乖崖 金守溫)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으며 세종의 두터운 심임을 받았다. 신미와 세종을 연결한 장본인이 괴외가 아니었나 싶다.

 불교신자였던 세종이 신미에게 감명을 받은 것은 바로 능엄경(楞嚴經)이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능엄경의 다라니를 외우면 임금과 백성, 나라가 다복해 질수 있다는 신앙을 세종은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글의 자형이 다라니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지론이다.

 음악을 사랑한 세종이 가까이 한 인물은 바로 천재적 음악가 난계 박연(蘭溪 朴堧)이었다. 일설에는 박연으로부터 '궁상각치우' 오음(五音)에서 한글창제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설도 있다.

 세종은 박연에게 명해 세계 최초로 400여 명을 단원으로 하는 국악교향악단을 만들었다. 지금도 매년 종묘제례 때 공연되는 세계문화유산 종묘제례악이 그 유풍이다.

 세종은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청주 초정약수에 와서 121일을 지냈다. 세종은 왜 한양 정궁을 떠나 이렇게 많은 날짜를 초정에서 보낸 것일까.

 겉으로는 안질치료를 핑계로 속리산 복천암에 있던 신미를 불러 한글창제 비밀 프로젝트를 완성하려 한 것은 아닌가. 한 나라의 국왕이 전란이 아니고서는 4개월씩이나 조정을 비우고 지방 행궁에서 보낸 사례는 없다.

 세종은 효성이 깊었다. 부친인 태종도 효성에 감동했으며 몸이 비대해 건강이 나빴던 세자의 건강을 걱정하기도 했다. 세종은 당뇨를 앓고 있었으며 지나친 공부와 과로로 만년에는 시력을 잃기까지 했다.

 초정으로 어가를 움직이면서 세종은 유숙했던 곳에서 효자를 발굴해 포상했다. 진천 백곡저수지에 살았던 효자 김덕숭(金德崇)을 특별히 행궁으로 부르기도 했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세종은 김덕숭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소식을 듣고 효행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기록하고 마을에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했다.

 청주시 초정약수터에 세종행궁이 지어졌다. 옛날 건축 양식으로 웅장하게 지어졌는데 향후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듯하다.

 그런데 문화계 인사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집만 지어놨지 '세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종의 위업과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컨텐츠가 없다는 주장이다.

 평생 백성의 삶을 걱정하고 자신의 건강을 해쳐 가면서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세종. 세종행궁이 대왕의 위민정신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인륜상실 시대 특별한 인의(仁義)교육 공간으로 활용됐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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