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과거 외에 유일(遺逸)이라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기도 했다. 이는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를 시험없이 발탁하는 제도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대상이 됐다.훈구와 사림파의 대결로 사화(士禍)가 자주 일어나면서 난세를 피해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가 크게 늘어났다. 이에 명종은 인물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유일을 통해 관료 일부를 임명했다. 그중에는 성제원(成悌元·1506년∼1559)이라는 인물도 포함돼 있다.'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청홍도 관찰사의 계본을 보니 공주에 사는 유학 성제원이 조행(操行)이 있다고 하니, 관직을 제수하라."'-본문 중 '정원'은 지금이 청와대 격인 승정원을, '조행'은 태도와 행실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청홍도'(청주와 홍성)는 당시 충주에서 이홍윤 역모사건이 일어나 붙여진 행정명이다. 당시 유일이 조정의 큰 관심사였는지 사관(史官)이 이례적으로 성제원에 대한 인물평을 남겼다. '성제원은 어려서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고, 날마다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렸으며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이다. 천성이 효우(孝友)스러워 어머니의 삼년상을 한결같이 예제에 따랐고, 최질을 몸에서 벗지 않고 늘 입고
조선시대에는 감옥을 그냥 '옥'(獄)이라고 불렀다. 이 옥은 의금부, 포도청,각 지방의 감영 소재지, 군현에도 각각 존재했다. 특히 지금의 서울구치소에 해당하는 옥은 '전옥서'(典獄署)라고 불렀고 종로에 위치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옥서가 '감옥서'로 바뀌었고, 이것이 다시 '감옥'(1907년)으로 변경됐다. 이때부터 감옥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감옥은 예나 지금이나 고통스런 곳이다. 더욱이 조선시대 감옥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세종대왕이 그 개선책을 직접 유시한다. '유시하기를, △매년 4월부터 8월까지는 새로 냉수를 길어다가 자주자주 옥 가운데에 바꾸어 놓을 것. △5월에서 7월 10일까지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몸을 씻게 할 것 △매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두발을 감게 할 것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을 두텁게 깔 것 △목욕 할 때에는 관리와 옥졸(獄卒)이 친히 스스로 검찰하여 도망하는 것을 막을 것" 이라 하였다.'- 원문은 '한 일'(一) 자로 돼 있으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로 처리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감옥환경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죄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속출했다. '의정부에
조선시대 세곡(稅穀) 운송은 사고가 적지 않았다. 특히 바닷길로의 수송은 거친 파도가 항상 문제가 됐다. 태종3년(1403)에 경상도에서 거둔 세곡을 싣고 남해안을 따라 운항하던 34척의 배가 거친 파도에 모두 침몰했다. 이날 사고로 1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실록은 쓰고 있다. 조선시대 인구수를 감안하면 초대형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경상도의 조운선(漕運船) 34척이 해중(海中)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島)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 " 하였다.'- 태종은 이날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이다"이라는 말로, 자신을 크게 책망했다. 그리고 해로가 아닌 육로로 운반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우대언(右代言) 이응(李膺)이 말하기를, "육로(陸路)로 운반하면 어려움이 더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만기요람(萬機要覽)이라는 고문헌을 보면 조선시대 환도 1개를 만들려면 환도장 6명 외에 소목(小木), 노야(爐冶), 동(銅), 마조(磨造), 주성(鑄成)장 등이 참여했다. 이 때문에 환도 1개 값은 쌀 2석5두로, 매우 비싼 편이었다. 언급한 6개 분야의 장(匠) 중 '동장'(銅匠)은 구리로 여러 가지 기물을 만드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다. 저잣거리에서는 보통 '퉁장'이라고 불렀고, 이때의 '퉁'은 동기(銅器)를 의미했다. 조선시대에는 구리의 원석을 '동철'(銅鐵)이라고 불렀다. 동철은 조선팔도 각지에서 적지 않게 생산됐다. 충남 공주도 그중 하나였다. '수철(水鐵)·동철(銅鐵) 모두 마현(馬峴)에서 생산된다.'- 본문 중 등장하는 '수철'은 무쇠를, 마현은 공주목에 속한 지형을 의미한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정철학으로 삼으면서 상업과 광업을 천시됐다. 따라서 동철은 나왔지만 그 제련법은 서툴렀다. 그 부족분은 주로 대마도에서 수입해 썼다. 대마도 사람들은 그 대가로 완성된 주조물이나 직물을 역수입해 갔다. 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마도수호 종정무(宗貞茂)가 동철(銅鐵) 5백 근을 보내었으니, 종(鍾)을 본보기로 만들어 주기를 청한 것이
송자대전 (宋子大典)은 송시열의 시와 각종 글을 모아놓은 시문집으로 1787년에 간행됐다. 송자대전도 사화(士禍)의 피해상을 사례를 들어 언급하고 있다. '사화(士禍)가 너무나 혹독하였습니다. 때문에 성수침은 기묘사화가 있을 줄 알고 성시(城市)에 숨었으며, 성운(成運)은 아우의 상을 당하여 슬픔을 안은 채 보은(報恩)에 숨었으며…'- 본문 중에 성운(1497∼1579)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송자대전은 성운의 은둔 이유를 '아우의 상'을 거론하고 있으나 또 다른 사료는 '형이 을사사화 때 화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공(성운 지칭)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일찍이 세속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 형 우(禹)가 을사사화에 비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가 그 인품과 같아서 한가롭고 아담하여 서호처사(西胡處士)의 운치가 있으니…'-" 따라서 내용은 다소 엇갈리나 형제 중에 사화 피해자가 나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성운의 보은 은거는 유유자적 그 자체였다. 특히 이동 수단으로 맹사성처럼 소를 즐겨탔던 모양이다. 맹사성은 소를 타고 피리를 즐겨 불었다. 반면 성운은 소를 타고 가서 거문고를 즐겨 뜯었다. '
조선시대 사관은 비밀리 작성된 사초와 공문서를 묶은 시정기(時政記)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했다. 1545년 윤원형의 소윤(小尹) 일파가 정순붕, 이기 등을 끌어들여 대윤(大尹)을 공격했다. 이른바 을사사화다. 당시 사관은 안명세(安名世·1518∼1548)였다. 그는 춘추필법에 따라 사화의 자세한 전말을 시정기로 작성했다. 당시 시정기에는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많은 선비들을 무고하게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씨앗이 돼 3년 만에 필화(筆禍) 사건이 일어났다. 을사사화의 가해자였던 이기는 3년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이라는 책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때 한지원이라는 인물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 정순붕 등에게 밀고했다. 그는 을사년 당시 안명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다. 안명세가 붙들여 왔고 심문이 시작됐다. 안명세는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안명세는 형문 1차에 장삼십(杖三十)을 쳤으나, 지난번 공초와 똑같았다', '추관들이 아뢰기를, "안명세는 형추하여도 자복하지 않으니 내일 다시 형추하소서.'(밤
관찰사는 조선시대 때 지방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말단행정과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 사료는 관찰사로 있으면서 토목공사를 자주 한 인물로 이사균(李思鈞·1471∼1536)을 종종 거론하고 있다. '금상 19년에 사창(社倉)을 창설하였다. 관찰사 이사균(李思鈞)이 군에 마점고개가 있어서 동서로 막히고 돌 길이 험준하여 현민이 미곡을 내고 들이기에 고생하므로 사유를 갖추어 신청해서 설치하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마점고개는 전남 영광군에 위치하고 있다. 그가 조선시대식 토목공사를 자주 벌였는지 실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성품이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좋아해서 관직에 있을 때 늘 건축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이것이 그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기묘사화와 관련, 전회에 우리고장 청원옥산 인물인 박훈(朴薰·1484∼1540)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사균도 이 시대 인물로, 박훈과 이런저런 사연을 만들고 있다. 이사균이 기묘사화로 귀양길에 오른 박훈을 중도에 만났던 모양이다. '승지로 임명되어 돌아오다가 박훈과 기준(奇遵)이 남쪽 지방으로 귀양가는 도중 갈원(葛院)에서 서로 만났다. 서로 다정하게 대화를 하다가 시사(時事)에 언급되었을
흔히 조광조, 정광필, 안당, 이장곤, 김정, 김식, 기준, 신명인 등을 기묘사화의 희생자들이라고 해서 기묘팔현(己卯八賢)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중 조광조, 안당, 김정, 김식, 기준 등은 처형이나 자살 등에 의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팔현 중에도 충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 적지 않다. 김정, 김식 등은 각각 우리고장 보은, 청풍인이고 정광필은 충남 회덕 사람이다. 신명인(申命仁·1492∼?)은 적어도 사료상으로는 충북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자살한 김식(金湜)의 시신을 맞은 사람이 신명인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는 김식의 수제자였다. '경진년에 김식이 화에 걸려 죽자 그 시체를 영남으로부터 운반하여 올라오는데, 김식의 부인 이씨가 충주(忠州)로 가서 시체를 맞아 염습하고 관에 넣어서 임시로 그곳에 매장하였다.'- '공(신명인)은 멀리서도 시체가 충주에 도착하는 날짜를 헤아리더니 감개하고 애도하여 마침내 송옥(宋玉)을 조상하는 글을 지어 대성(大成·김식 지칭)의 부득이한 뜻을 밝히고…'- 본문 중 '송옥'(宋玉·BC ?~BC ?)은 중국 고대 문장가로, 충성을 의심받아 쫓겨나는 신하의 심정을 가을의 서글픔에 많이 비유했다.
현량과(賢良科)는 과거시험이 아닌 천거에 의해 유능한 인재를 선발·임용하던 조선시대 인재선발 제도를 말한다. '안당이 아뢰기를, "이제 성균관이 천거한 것을 살펴보니, 조광조·김식·박훈 등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실로 경서에 밝고 행실과 수양이 있는 사람으로서 천거되었으니(…) 이 사람들을 등용하는 것은 마땅히 문신을 등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야 합니다.'- 본분 중에 조광조, 김식, 박훈 등 세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등장한다. 이를테면 조선 현량과 1기 동기생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왠지 '젊은 피' 조광조와 동기생이 됐다는 점이 불안하다. 이들 3인 중 김식(金湜·1482∼1520)은 처음 접하는 인물이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은 임금의 권력이 약해지고 신하의 권력이 강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이 현상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환국(換局)을 세번이라 일으킨 숙종이다. 중종도 버금갔다. 중종은 신진 사림들이 신강(臣强)의 모습을 보이자 기묘사화를 일으켜 이들을 한밤중에 전격 체포했다. 죄목은 '붕당'과 '배척'이었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를 내렸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은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
허균(許筠·1569∼1618)은 역모사건과 연루, 당시 표현대로라면 '역적의 괴수'가 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따라서 허균의 유작은 공개적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몰래 필사돼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중에 '성소부부고'(惺所覆부藁)라는 문집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최원정은 세상을 내리보고서 벼슬하지 아니하고 화나 면하기를 바랐다. 하루는 제현(諸賢)이 정암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다 산수를 그리자 김정(金淨)이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 산 봉우리 우뚝한데(淸曉巖峯立) / 흰 구름은 산 기슭에 비꼈네(白雲橫翠微) / 강촌에는 사람 모습 보이지 않고(江村人不見) / 강변 나무 저 멀리 아득하누나(江樹遠依依).' 본문중 최원정은 최수성(崔壽山+成·1487∼1521), 정암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일컫고 있고, 김정(1486~1520)은 우리고장 보은출신으로 사약을 받고 절명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세 사람이 한 공간에 등장했고, 또 시화까지 나눴다는 것은 이들 세 사람이 친구 사이를 넘어 사상적 동지였음을 의미한다. 조광조와 김정은 본란을 통해 어느정도 소개됐으나 최수성은 처음 접하는 이름이다. 그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고려말기 혁명파들은 불교를 비판했다. 특히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은 정도전이 가장 혹독하게 불교를 비난했다. 이때의 '불씨'는 석가모니를 의미한다. 고려 말기 혁명파들이 불교를 공격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절(寺)은 '사찰경제'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쥐고 있었다. 당시 혁명파는 이 경제력을 빼앗기 위해 사찰을 공격했다. 따라서 조선전기 서원(書院)은 절을 파괴한 후 그 자리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백운동 서원의 후신)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본래 숙영사(宿永寺)라는 절터였다. 소수서원 입구에 서있는 당간지주(보물 제 59호)가 이를 증명한다. 조선의 3대 기인으로는 대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 북창 정렴 등이 꼽히고 있다. 이중 정렴(1506~1549)은 천문·의학·복서·그림 등 모든 방면에 두루 뛰어났다. 이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실록에 남겨져 있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옛날에 정염이란 자가 있어 심통술(心通術)을 얻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이 사람이 의술을 잘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학문의 공도 있었는가"…
중종의 정비는 단경왕후(端敬王后·1487~1557)로, 신수근의 딸이다. 1499년(연산군 5) 중종이 진성대군(晋城大君)으로 있을 때 그와 결혼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중종반정과 함께 성희안(成希顔) 등 반정 추진파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반대한 이유는 연산군이 그에게 매부가 되기 때문이었다. 단경왕후도 단순히 혈연적인 이유로 정비 자리에서 폐위돼 본가로 쫓겨났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다. 2백년 가까운 영조 때가 되서야 왕후로 복위됐다. 1515년 담양부사 박상(朴祥·1474∼1530)이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문을 올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김정은 전회에도 밝힌 적이 있지만 우리고장 보은출신이다. '지금 내정(內政)의 주인이 비었으니, 마땅히 이때를 계기로 쾌히 결단하셔서 신씨(愼氏)를 곤후(坤后)의 자리에 앉히시면, 천지의 마음이 흠향할 것이요 조종의 신령이 윤허할 것이고, 신민의 희망에 부응할 것입니다'.- 본문 중 '곤후'는 왕후를 말한다. 앞서 조광조를 거론한 이유가 있다. 상소문을 본 조광조가 둘을 적극 두둔하고 나섰다. 이는 세 사람이 사상적 동지였음을 의미하고
통행금지하면 박정희 정권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통행금지가 존재했다. 당시에는 2경(밤10시)이 되면 일월성신에게 밤새 안녕을 기원한다는 뜻으로 종을 28번 쳤다. 이를 '인경'(쓰기는 人定)이라고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일월성신이 밤하늘을 28구역으로 나눠 관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국의 주요 종(鐘)을 28번 쳤다. 통행금지 해제는 비교적 이른 시간인 5경(새벽 4시)에 33번 타종했다. 파루(罷漏)라고 불렀다. 이는 제석천이 이끄는 33천(天)에 하루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통금을 위반한 자는 다음날 곤장형을 받았다. 그러나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관에서 발급한 '표신'(標信)을 휴대하면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했다. 임시 통행증의 일종인 표신은 네모진 나무패 모양으로, 그 전면에는 '開門', '閉門' 글자를, 뒷면에는 어압(御押·임금의 수결)을 새겼다. 사림파가 무더기로 축출되는 기묘사화 때도 표신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윤자임이 크게 외쳐 말하기를, "공(公)들은 어찌하여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니, 이장곤 등이 답하기를, "대내(大內)에서 표신(標信)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왔소" 하였다. 윤자임이 말하기를, "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개나리 봇짐을 진 선비가 어디론가 부지런히 걷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이와 관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봇짐 안에 옷가지가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옷이라야 맞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개나리 봇짐 안에는 열에 아홉은 면포(木綿)가 들어 있었다. 조선 조정은 지폐인 저화(楮貨)를 대중적으로 유통시키려 노력했으나, 뜻대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면포 때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이 이를 현물화폐 로 사용하면서 저화 유통량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고려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몰래 반입한 목화는 조선 백성들의 의류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양민들은 베옷만 입은 채 겨울을 나는 경우가 허다분했다. 그만큼 조선시대 보온환경을 열악했다. 중종 때 이를 다루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던 모양이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자가 곡식 심기를 폐지하고 목면을 심어서 말리(末利)를 좇게 되었으니, 곡식이 귀하고 면포가 천하게 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면포가 천하면 마땅히 백성이 추위에 떨지 않을 것 같지만 그 폐해는 또한 베가 거칠게 되어 추운 자가 옷으로 만들 수 없게 되었으니…'- 본문…
중종은 부인과 관련해 줏대가 없는 왕이라는 평가를 받고는 한다. 정비인 단경왕후가 남편 중종에 의해 폐위된 후 제1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파평윤씨가 1515년 원자(후에 인종)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25이었다. 그리 문제될 것 없었던 이 사건이 조선 조정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얽히고 얽힌 인척 관계가 시발점이었다. 장경왕후 파평윤씨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제2 계바가 된 여자는 후궁 출신의 문정왕후 파평윤씨였다. 이로써 서열상으로 전임 왕비였던 장경왕후 일족인 윤임 등은 대윤(大尹), 후임 왕비인 문정왕후 일족인 윤원형 등은 소윤(小尹)으로 부르게 됐다. 대윤과 소윤은 가까운 일가였다. 윤임(대윤의 영수)의 증조부 윤사윤은 윤원형(소윤의 영수)의 고조부인 윤사흔 형이었다.그러나 정치 권력은 이같은 일가촌수를 고려해 주지는 않았다. 윤원형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 일파를 축출하기 위해 이른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소윤 일파는 대윤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했다고 무고했다. 그리고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성종의 3남)을…
중국 한나라는 이른바 효렴(孝廉)과 현량(賢良)을 천거, 관리로 임용했다. 이때의 효렴은 효성이 깊으면서 청렴한 사람, 현량은 어진 인물을 일컫고 있다, 조선 중종 때 이 제도가 수입됐다. 그 유명한 현량과(賢良科)이다. 누가 이 제도를 주장했는가를 둘러싸고는 다소의 논란이 있다. 어떤 사료는 조광조를, 또 다른 사료는 안당(安·, 1461∼1521)을 지목하고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안당을 거론하고 있다.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고, 김굉필, 정여창을 추증하고, 조광조, 김식, 박훈을 뽑아 올리고, 김안국, 김정, 송흠, 반석평을 추천해 썼으며, 천과(薦科)를 설치하는 등 모든 일에 공의 힘이 컸다'.- 본문중 천과는 현량과를 의미한다. 중종도 처음에는 "옛날 어진 재상이 널리 인재를 구하느라고 토포악발(吐哺握髮)까지 한 것은 모두 이를 가장 급무로 여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등 처음에는 현량과를 지지한다. '토포악발'은 주공(周公)의 고사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의역하면 인재를 중시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훈구파는 사림파가 자파 사람들을 등용시키기 위해 현량과 제도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들의 줄기찬 상소는 중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조광조 뒤의 인물로 김안로(金安老)가 있다. 그의 아들은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혼인했다. 김안로는 이를 배경으로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송인수(宋麟壽·1499∼1547)가 부당함을 처음으로 지적했다. 그는 김안로의 미움을 사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됐다. 이때 송인수는 병을 핑계로 임지에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다시 빌미가 돼 다시 사천으로 유배됐다. '송인수를 경상도 사천에 유배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 안로가 심히 그를 미워하여 제주 목사로 임명해 쫓아내어 인수가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고을을 버리고 올라왔다'.- 1537년 이른바 정유삼흉(丁酉三兇) 사건으로 김안로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처럼 몰락했다. 정유삼흉은 김안로, 허항, 채무택 등으로, 이들은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유배 후 사사됐다. 김안로가 죽자 바로 송인수가 복권됐다. 그가 여러 중앙직을 거친 끝에 1543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정자 기영정(耆英亭)이 전남 장성 삼계면에 세워졌다. 이 정자를 배경으로 유명한 기녀담 하나가 탄생한다. '공은 부안(扶安) 기생을 좋아하면서도 은근한 정은 통하지 않고 다만 데리고 같이 다닐 뿐이었다. (...) 임기를 마
간언의 일종인 간쟁은 그 방법과 정도에 따라 풍간(諷諫), 순간(順諫), 직간(直諫), 쟁간(爭諫), 함간(陷諫) 등으로 구분된다. 풍간은 사실을 돌려 비유해 간하는 것, 순간은 말을 온순히 하여 임금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간하는 것, 직간은 정면으로 정직하게 간하는 것, 쟁간은 시비를 쟁론해 군주가 행하도록 강제하는 것, 함간은 일신의 목숨까지도 돌보지 아니하고 간하는 것을 말한다. 훈구파와 사림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이른바 화살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멀지 않아 궁궐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임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글을 화살에 묶어서 의정부의 문과 사간원의 문에 쏘았었는데 그 글에 '김정, 조광조, 이자, 한충, 이약빙 등 30여 인이 국정을 변경하고 어지럽혀서…' 하였다'.- 전회에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옥에 갖히자 이약수라는 인물이 성균관 유생의 소두가 되어 상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역시 훈구와 사림이 격돌하는 모습의 하나였다. '성균관의 유생 이약수 등 1백 50여 인이 궐하(闕下)에서 상소하고 궐문을 밀고 난입하여 곧바로 합문 밖에 가서 통곡하니, 곡성이 궐정(闕庭)에 진동하였다'.- 앞
여러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을 표명하기 위하여 연명으로 작성한 문서를 '연판장'이라고 말한다. 조선시대에도 연판장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이때 연명의 서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을 소두(蔬頭)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두가 되려면 다소의 용기가 필요하다. 민원의 주모자로 낙인 찍히면서, 사건이 어느정도 잠잠해 지면 사건을 추궁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한때 중종의 총애를 받았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옥에 갖혔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 150명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이 경복궁 합문을 밀치고 들어와 곡성(哭聲)으로 집단 항의를 했다. 이 부분이 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성균관의 유생 이약수 등 1백 50여 인이 궐하(闕下)에서 상소하고 궐문을 밀고 난입하여 곧바로 합문 밖에 가서 통곡하니, 곡성이 궐정(闕庭)에 진동하였다'.- 본문 중에 이약수(李若水·1486~1531)라는 이름이 보인다. 바로 이날 행동의 소두가 이약수였다. 그러나 유생들의 이날 집단 시위는 관철되지 않았다. 되레 주모자를 의금부에 가두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이는 중종이 조광조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접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임금
'상사였던 남곤이 북경에서 병을 얻어 거의 위태하였는데, 공이 애써 약으로 구료(救療)하였다. 서장관 한충이 공에게 귀엣말로, "저놈이 반드시 사류(士流)를 적지(赤地)로 만들 것이오" 하였다. 공은 정색하고 말리면서 오히려 보호하기를 더하였다'.-- 전회에 등장했던 내용으로, 본문 중 '공'은 이자(李 耕의 井대신 子·1480~1533)이다. 정황상 이때 두 가지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남곤이 병을 얻어 위험에 빠지자 이자가 정성어린 간호를 했다. 둘째, 사림파인 한충이 욕설을 써가며 훈구파인 남곤을 비난했다. 북경에서 일어났던 이때의 일은 두 사람 개인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한충은 이때 남곤과 맺은 악연으로 결국 35살 젊은 나이에 석연치 않은 옥사를 당한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당시 사람들은 석연치 않은 죽음에 남곤이 관여된 것으로 의심했다. '장차 심리하려던 밤에 옥중에서 죽었는데, 음경(陰莖)이 한 자 넘게 빠져나와 있었다. 액살(縊殺·목졸려 죽음)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는 안로(安王+路)가 편찬한 필사본으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면 또 다른 당사자였던 이자는…
기묘사화 직전의 훈구파 대표선수는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남곤과 심정이 신진 사림을 가장 모질게 학대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곤정(袞貞)'으로 부르며, 소인배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했다. 이런 남곤이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서장관(書狀官) 한충, 이자 등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 주청사는 조선시대 때 정치나 외교적으로 청할 일 또는 알려야 할 사항이 있을 때 중국에 임시로 파견된던 사신을 말한다. 서장관은 사신 일행 중 기록 의무를 맡은 관리로, 왕에게 직접 보고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1518년 사신 일행이 명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북경)에 도착했다. 이때 남곤과 한충 사이에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다. '상사였던 남곤이 북경에서 병을 얻어 거의 위태하였는데, 공이 애써 약으로 구료(救療)하였다. 서장관 한충이 공에게 귀엣말로, "저놈이 반드시 사류(士流)를 적지(赤地)로 만들 것이오" 하였다. 공은 정색하고 말리면서 오히려 보호하기를 더하였다'.-- 본문 중 공은 동행한 이자를 말한다. 정황상 한충(韓忠·1486∼1521)과 남곤 사이는 평소부터 안 좋았고, 그 이면에는 한중이 "士流를 붉게 만들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사극을 보면 죄인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소달구지 우리에 갖힌 채 압송되는 장면이 더러 나온다. 이는 죄인이 유배를 떠나는 장면이 아니라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이다. 이때의 소달구지를 함거(檻車)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후 서울로 압송될 때 이 함거가 사용됐다. 전회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한 관료가 이세좌(당시 형방승지·정3품)라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이같은 우연은 장차 가혹으로 다가왔다. 그 이전에 이미 이세좌는 연산군과 악연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궁중연회 때 어의(御衣), 즉 연산군 옷자락에 술을 엎지른 죄(?)로 남녘 무안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다음은 인정전의 궁중연회 후 연산군이 곱씹어 하는 말이다. 그날 어떤 대신은 취기에 기녀에게 과일도 던졌던 모양이다. "이계동(李季仝)이 과일을 던져 기생을 희롱한 것도 대간이 오히려 탄핵하였는데, 이세좌(李世佐)는 하사하는 술을 엎질렀으니 이는 교만 방종하여 그런 것이니, 계동의 일보다도 공손스럽지 못함이 더욱 심하다.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나 대간이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으니…'- 이세좌의 아들 중에 수정(守貞·1477~1504)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아버
중종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빌미로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며, 국문받을 때에 한 짓도 죽을 만하다. 또 조광조가 시종직에 오래 있었으므로 나도 그 사람을 조금은 아는데 그 마음이 곧지 않으며, 김정은 우혹(愚惑)하다"하매…'- 조광조는 능주(지금의 전남 화순)라는 곳으로 유배됐다. 유배지에서의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하명이 내려졌다. 여러 사료가 이 부분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억울한 죽음을 강조하는 의미로 보인다. '드디어 약을 마셨는데,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금부의 나졸들이 나가 목을 조르려 하였다. 조광조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하찮은 신하의 머리를 보전하려 하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고 더욱 독한 약을 마시고 드러누워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으니, 바로 12월 20일로…'.- 조광조의 시신은 죽어에도 바로 안식처를 찾지 못했다. 한 계절을 건천에서 보낸 끝에 이듬해 봄에야 안장됐다. '소 수레로 관을 용인으로 옮겨다가 이듬해 봄 선산
조선시대 기녀들은 기생(妓生), 은근자(殷勤者), 탑앙모리(搭仰謀利) 등 3등급으로 분류됐다. 이중 기생은 어떤 모임에서 가무로 흥을 돋구는 여자, 은근자는 남들 몰래 매춘하는 부류, 탑앙모리는 매춘 자체만을 업으로 삼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기녀들에게는 이른바 수모법(隨母法)이 엄격하게 적용됐다. 즉 어머니가 기녀이면 그 딸도 운명적으로 기녀가 돼야 했다. 이들의 공식적인 활동기간은 15~50세까지로, 쉰살이 넘으면 퇴기(退妓)라고 불렀다. 기녀와 관련해 해어화(解語花)라는 자못 운치있는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다. 당시 양반들은 자신의 시와 문장을 알아주는 기녀를 그렇게 불렀다. 육체를 탐닉하다 보니, 되레 기녀들에게 아부하는 표현으로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고위관료 중 기녀와 관련해 스캔들을 자주 빚은 인물로 유운(柳雲·1485~1528)이 있다. 그가 충청도관찰사로서 우리 고장 청주, 진천 등지를 순회하던 중 기녀를 끼고 놀았던 모양이다. 당시 관찰사 직무공간인 감영은 공주에 위치했다. '큰 눈이 내렸다. 조계(朝啓)를 들었다. 지평 이연경(李延慶)이 아뢰기를, "듣건대, 충청감사 유운(柳雲)이 갈려올 때 청주 기녀
조선시대 수사용어 중에 공초(供招)와 공초(供草)가 있다. 우리말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것에서 보듯, 그 뜻은 다르다. 공초(供招)는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에 비해 공초(供草)는 다소 포괄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죄인을 신문하는 것을 취초(取招), 자백을 받는 것을 봉초(捧招), 두 번 이상 신문하는 것을 갱초(更招)라고 했고, 이를 통털어서는 공초(供草)라고 불렀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와 관련, 많은 사람들이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만이 조의제문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김일손과 함께 당시 사관으로 있었던 권경유(權景裕·?∼1498)도 관여했다. 추관들에 의한 공초(供草)가 시작됐다. 권경유는 당당하게 심문에 응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의금부 관리들에게 '비록 만세후라도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표현을 넣어줄걸 요구한다. '경유(景裕)는 '이보다 더할 수 없다.'는 구절 아래에 '비록 만세 후라도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더 넣어 달라고 청했다. 추관이 듣지 아니하니, 경유는 붓을 던지고 서명(署名)을 거부했다. 급기야 고문을 당했
[충북일보]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로 충북은 취업자 10명 중 3명이 60세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13일 국가통계포털을 분석한 결과 지난 5월 전국 취업자는 2천891만5천 명으로 이 가운데 23.1%인 667만9천 명이 60세 이상이었다. 월별로 보면 지난해는 1월(540만4천 명), 2월(577만2천 명), 12월(596만4천 명)을 제외한 9개월은 60세 이상 취업자는 600만 명 대을 유지했다. 올해는 1월(575만4천 명)을 제외하고 2월부터 5월까지 600만 명대를 기록 중이며 2월 606만9천 명, 3월 636만7천 명, 4월 656만6천 명, 5월 667만9천 명 등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충북은 5월 기준 취업자 97만 명 가운데 60세 이상은 27.4%인 26만6천 명으로 집계됐다. 충북에서도 60세 이상 취업자 증가세는 꾸준하다. 지난 2014년 5월 기준 전체 취업자 수 대비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16.8%였으나 2019년 5월에는 21.0%로 올라섰다. 이어 2020년 5월 22.1%, 2021년 5월 23.4%, 2022년 5월 25.8%, 2023년 5월 26.2%로 증가 추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자신의 돈을 훔쳐 갔다고 생각해 흉기를 들고 지인들을 위협한 4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진천경찰서는 A(41)씨를 특수협박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고 13일 밝혔다. A씨는 지난 9일 오후 7시 45분 진천군 광해원면 자신의 주거지에서 지인 B(59)씨와 C(54)씨에게 흉기를 들고 위협한 혐의를 받는다. 당시 A씨는 술을 마시던 중 주머니에 있는 돈이 없어져 이를 찾다가 B씨와 C씨가 돈을 가져간 것으로 생각하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은 A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술에 취해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A씨를 상대로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 임성민기자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증평·진천·음성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부족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중임을 맡겨주신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총선 승리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약속드린 미래 비전을 군민들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선에 성공한 임호선(61)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증평·진천·음성)은 겸손한 자세로 소통하며 어려운 민생부터 확실히 챙겨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총선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며 "서민경제를 살피지 못하고 국정운영을 독단적으로 하며 과거로 퇴행하려는 정부에 브레이크를 잡으라는 민심이다. 제1야당으로서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적극 따르며 민생해결과 지역발전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앞으로의 의정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22대 국회에서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활동을 원하고 있다. 임 당선인은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현재도 농촌에 살고 있다"며 "지역적으로도 증평·진천·음성군이 농촌이기에 누구보다 농업농촌의 현실을 잘 이해하고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임 당선인은 "농촌이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