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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우석대 교수

지난 주말에 실내에서 열린 문학 행사에 다녀왔다. 백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의무적으로 실내 마스크를 착용하는 부담이 줄어선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모처럼 아는 얼굴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의 정체성은 표정에 있는 게 아닐까?'

오랫동안 우리는 '이름'을 통해 누군가를 인정했다. 그러다가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문이나 홍채 같은 생체 인증을 통해 개인의 자격을 인증받는 단계까지 왔다. 한마디로 우리는 '인정'받는 존재에서 '인증'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인정과 인증은 어쩌면 별 차이 없을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당신이 당신이라는 걸 알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정과 인증에는 다른 의미 맥락이 있다. 인증은 배제를 전제하고, 인정은 포용하려는 의지가 깔려 있다. 지문이나 홍채를 통해 인증받지 못한 사람은 구성원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정이 좀 더 인간적인 증명 방식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때로는 가혹한 좌절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인간 소외는 대개 '인정'의 문제에서 비롯한다.

인정과 인증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가 늘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호기롭게 외치는 '나는 나다'라는 말은 드라마일 뿐이다. 우리는 '네가 너라는 걸 인정(인증)한다'라는 언술 안에서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 나는 '당신의 표정'을 발견했다. 그건 안면 인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마스크를 벗은 사람들은 각자의 표정으로 자기를 드러냈다. 그 표정은 내가 아는 '그 사람'이었고, 그의 표정을 통해 나는 그와의 인연과 그에 대한 감정을 기억해냈다. 그건 그의 이름이나 직업 같은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뭐랄까? 표정에는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행사보다는 사람들의 표정에 눈길을 주었다. 크게 웃는 사람, 그냥 웃는 사람, 미소 짓는 사람, 무표정한 사람, 찡그린 사람.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건 그의 감정이 변한다는 의미였다. 그때 내 머릿속에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사람의 표정은 세상의 표정이라는 것. 세상의 지문이 얼굴에 저마다의 표정을 만든다는 것. 세상을 향한 인간 감정의 굴곡이 표정에 새겨진다는 것. 뭐 그런 생각들이 파문처럼 거듭 일어나고 가라앉았다.

그건 바람을 맞으면 바람의 표정이, 소낙비를 맞으면 소낙비의 표정이 얼굴에 새겨지는 일이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표정이, 싫은 사람을 만나면 언짢은 표정이 감추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먹으라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바로 우리를 만든다고.

나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삶의 우여곡절은 얼굴에 드러난다고도 한다. 인상이라는 말에서 차지하는 표정의 지분도 상당하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옛말처럼 표정은 상대의 마음을 끌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표정 없이 살았다. 아니, 표정 짓지 못하고 살았다.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부직포로 만든 하얗거나 까만 마스크가 있었을 뿐이다. 그건 인정받기도 인증받기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표정들이 돌아왔다. 백 개도 넘는 표정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표정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증명하는 거라고. 그건 인정하고 인증할 문제를 넘어선 것이었다. 표정이 세상의 지문인 것처럼, 그가 짓는 표정은 그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었다. 그의 표정 속에 내가 있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표정을 짓게 하는 일은 나 자신을 짓는 일이었다. 모처럼 나는 나를 만났다. 당신에게서 오늘의 표정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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