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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3.10.09 19:03:47
  • 최종수정2013.10.09 19:03:47

김복희

유난히 길었던 지리한 여름이가고 돌아가신 엄마의 고향 가덕 들녁엔 어느새 가을이 왔다

지난 추석명절 엄마 산소가는 길 고은리부터 노동리까지 약 2km 이상 양쪽길가에는 코스모스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유난이 꽃과 화초를 좋아하시던 엄마생각에 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나도 모르게 엄마 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벌써 꽃상여 타고 하늘나라로 가신지 7개월이 된 엄마를 말이다.

엄마라는 이름만 불러도 행복한 어린시절부터 돌아가신날 목이쉬도록 슬프게 불렀던 엄마 였는데 지금은 너무도 멀리 계신다.

한평생 자식을 위해 희생을 하고 모든 친지 이웃에게도 아끼지 않았던 정 많으신 엄마. 불쌍한 이웃을 내 식구 처럼 챙기시고 어려운 친지들에게 우리집 밥 안먹고 공부한 사람 없이 베푸셨던 엄마. 꽃상여 타고 가시던 날, 화창하게 날씨 마져 곱게 차려입고 꽃가마 위를 단장해 주었다.

3월햇살은 꽃가마 가시는 길 배웅하는 상주들에게 따듯하게 내려앉았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자식들 생각하느라 편안하고 곱게 돌아가신 엄마...

6남매를 낳아 잘길러 주시고 아버지 병 뒷바라지에 젊어서는 가진 고생다하시고 자식이라면 꿈뻑하신 엄마는 큰아들 바보였다.

정 많으신 엄마는 다 베풀고 살았지만 특히 큰아들 사랑은 남달랐다.

옛날 부모님들은 다 큰아들 선호사상이 있었지만 특히 엄마는 방송국 다니는 큰아들을 사랑했다. 영원하실줄 알았던 엄마 영원히 돌아가시지 않을줄 알았던 내 어릴적 엄마는 결국 치매라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사랑하던 자식들도 다 몰라보았다.

남달리 사랑했던 큰아들을 자기 동생으로 생각하는 웃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큰아들이 암과 투병할때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고 계셨었다.

결국은 힘들어했던 큰아들 병도 다 낫게 해주시고 아들품에서 곱게 돌아가셨다. 평소에 머리가 많이 아파서 약을 항상 드시던 엄마는 아픈것 하나 모르시고 늘 맛있게 식사 하시고 일주일 정도만 못드시고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몇년전 정신이 있으실 때 늘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엄마 죽으면 나는 꽃상여 타고 가고 싶구나, 니들은 다 삼베옷 입고 ..." 유언대로 우리는 그야말로 옛날 장례식으로 무거운 삼베옷에 지팡이들고 두건쓰고 옛날 방식으로 장례를 치뤘다.

예쁜 꽃상여 상두꾼은 당연히 큰아들 친구들 몫이었다.

"이제가면 언제오나 어허어허 어허어아"

"이제가면 못올텐데 애달고도 설운지고 어허어허 어허어아"

엄마하고 친하게 지내시던 요령잡이 강씨 아저씨의 구슬픈 목소리는 꽃상여 뒤를 잇는 상주들에게 충분한 눈물을 흘리게 했다.

엄마는 평생 지극정성으로 절에 다니셨다.우리는 엄마가 다니신 절에 49제로 모셨다.

일주일에 한번씩 영가전에 드리는 제사를 올렸다.

"살아생전 애착하던 사대육신 무엇인고

한순간에 숨거두니 주인 없는 목석일세

인연따라 모인것도 인연따라 흩어지니

태어남도 인연이요 돌아감도 인연인걸

그 무엇을 애착하고 그 무엇을 슬퍼하랴..."

돌아감도 인연이라서 슬퍼하지 말라고 하시는 스님의 구슬픈 목소리와 목탁소리는 내게 한없는 눈물을 흘리게 했다.

해마다 가을에 고추를 다듬으시며 꼭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가 올해 마지막 김장김치를 담을 듯 싶다." 또 이듬해 봄이 오면 "올해 내가 마지막 고추장을 담그지 싶다."

몇 해 동안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건강하셨을 때 인데 그때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자식들 끔직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본인 돌아가신 후에 자식들 건강걱정을 미리 하신 듯 싶다.

사실 엄마가 담근 김치,된장,고추장은 온갖 친지들 동네분들은 해마다 다 가져다 드시고 일품이라고 소문이 나있었다.

지금도 친정엔 여름이면 호박넝쿨이 무성하다.

큰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호박요리 였기 때문이다.

집 밖 울타리까지 온통 호박을 심으셨다. 가난했던 시절 자식들에게 제대로 못먹인게 한이 되신 부모의 미안한 마음에 보상심리이셨을까...

세상의 모든 어머니 이야기들은 다 소설이다.

눈물 겨운 많고 많은 이야기를 다 어찌 옮길 수 있을까,

세상은 나누고 더불어 사는거라고 늘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엄마.

가난한 시절 밥 한그릇도 물 부어넣고 푹푹끓여 더 힘들었던 이웃 가족 여러명과 나누어먹던 엄마이셨다.

동네에 자식을 셋낳고 도망간 집이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집 밥 한그릇은 아예 그집 아이들 몫이었다.

엄마의 정성으로 큰 그집 딸아이가 지난 주 결혼을 했다.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거다.

우리 자식들은 엄마의 한 없는 그 선량함은 아니더라도 매사에 크건 작건간에 최소한의 나눔으로 살아가고 있다.

엄마의 지혜로움과 너그러움은 우리 가족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우리가족은 유난히 우애가 있다. 시리고 아플때도 기쁘고 행복할 때도 엄마의 큰 유산을 생각하며 살아갈것이다.

어디선가 또 엄마의 냄새가 난다. 엄마의 향기따라 내 발이 옮겨진다.

엄마산소 가는 길 고은리 긴~코스모스 길이다.

고우셨던 엄마를 닮은 길.

오늘은 더욱 아름다워 또 눈물이 난다.

그리운 엄마~

/김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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