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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미

청주교육지원청 장학사

눈이 맑아 호수를 연상케 하는 아이, 나를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날 정도로 학교생활에서 찰떡궁합이었던 아이가 있었다. 특수학급을 맡았을 때 유난히 엉뚱한 행동을 해서 나를 당황하게 하였던 아이였다. 처음 그 아이와 생활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힘든 일이 많았다. 대소변을 가릴 줄 몰라 바지에 실례를 자주 하곤 하였다. 고령의 할머니 보살핌으로 생활을 하여 학교에 올 수 있는 형편도 못 되었다. 학교에서 열리는 알뜰바자회에서 미리 바지를 여러 벌 구입해 놓았다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입혀 보냈다. 알뜰바자회에서 구입 한 옷을 입혀 보낼 때에는 마치 새 옷을 입은 냥 즐거워하였다.

학교 교문에 들어서면 추운 날씨에도 오들오들 떨면서 실내화를 가지고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선생님하면서 안길 때의 그 체온이 지금도 남아있는 듯하다. 교무실에 들어서면 교감 선생님 자리에 딱 버티고 앉아 인사를 하곤 하였다. 선생님들 성함을 신기하리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어 놀랐는데 내 이름만큼은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항상 '오뻥'이라고 불러 나의 애칭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동료 교사들도 나를 '오뻥'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근감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었다.

전교생이 모두 현장학습을 가는 날 아이를 따라 '롯데월드'에 갔다. 담임선생님 혼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같이 동행을 하였다. 또래 친구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의 분신처럼 돌보아야만했다. 그날따라 현장학습을 온 학생들로 놀이기구를 타는 줄은 길기만 하였다.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아이는 무조건 안 태워준다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과 측은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아이의 엄마로 착각한 것이다. 순간 창피한 마음이 들어 아이를 데리고 장난감 가게로 갔다. 왜 떳떳하지 못했을까.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진다.

사리 분별력이 없어 옳고 그름을 가릴 줄 모르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아이라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컴퓨터 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해 그 아이가 울면 컴퓨터로 달래곤 하였다. 하루는 내 컴퓨터에 있는 중요한 자료를 모두 날려 버려 무척 고생한 적이 있었다. 교실에 있는 물감이나 크레파스를 보면 아무 곳이나 낙서를 해서 뒷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잠깐 교실을 떠날 때에도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직원조회를 하러 교무실에 있는데 언제 왔는지 불쑥 들어와 내 옆에 앉는 것이었다. 나가라고 하는 말에 큰 소리로 '엉엉' 울어 그 다음부터는 아예 그 아이의 자리도 마련해 같이 참석하게 하였다. 배려해 주신 모든 분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런데 아침이면 늘 나를 반갑게 맞이하던 그 아이가 어느 날 보이지 않았다. 궁금하기도 하고 허전한 마음마저 들었다. 집에 연락이 되지 않으니 초조한 마음은 더해만 갔다. 그 날 오후 늦게 접한 소식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자살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날 이후로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에게 매일 편지를 써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엄마는 가출하고 그나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생각만 해도 앞날이 캄캄하기만 하였다. 그런 상황을 잘 판단하지 못하는 아이라 어찌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별로 도움 줄 일이 없었다. '저 아이의 밝은 표정을 지켜주자' 하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하였다.

추운 겨울 어느 날 할머니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며 그 아이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냥 가슴이 허전하고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힘들었던 나날들이었다. 학교 전체가 조용해진 기분이 들 정도로 그 아이의 빈자리는 크기만 하였다. 떠남 뒤의 그리움은 더욱 짙어져만 갔다. 때론 귀찮아 소홀히 대했던 모든 일들이 후회되었으며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주지 못함이 지금도 못내 아쉽다.

선생님이 아닌 엄마로 나를 대했던 아이, 소중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아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아이 , 나의 애칭을 지어준 그 아이가 무척이나 그립다. 비록 짧은 인연이었지만 가슴속 깊이 살아 있으며 언젠가는 만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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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