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잇길

사잇길

2020.12.10 16:58:41

이두희

중원대학교 초빙교수

2년 전 나에게 주어진 이 작은 글 공간의 이름을 '사잇길'이라 지었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이란 뜻이었다. 그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그리고 혼자 또는 두어 명이 오순도순 걸어가는 오솔길의 이미지를 담고 싶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한 길,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이란 역시 '사랑'이라는 정답이 이미 나와 있다. 하지만 사랑은 예로부터 모든 예술의 주제요, 배경이었다. 사랑이야기가 문학의 처음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긴 세월 수많은 사랑타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명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떻게·'라는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너무도 빤한 결론이지만 '어떻게'라는 과정이 있어서 누구나 내일을 꿈꿀 수 있다. 사랑이나 삶이 그러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길은 수천수만 갈래의 길이 있을 터이고 그 길을 찾는 일은 문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평생 허겁지겁 쫓기며 살아온 나의 군 생활 중에도 다소 여유로운 시절이 있었다. 1993년 공군대학 교관 시절이었다. 그때 우연히 막 개봉한 영화 '서편제'를 보게 되었다. 그 영화가 끝나고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한이 서린 국악의 여운으로 인해 제작자들의 이름이 이어지며 올라가는 흰 스크린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진즉 내 속에 있었지만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정(情)과 한(恨)의 실체를 그 영화가 명징하게 깨닫게 해 준 순간이었다. 영화의 대단원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남매였던 두 남녀가 밤새도록 소리를 통해 해후하고 또 헤어지는 장면이었다. 서로의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어 애절하게 찾아 헤맸던 그들이었지만 다음 날 아침 아무 말 없이 다시 떠나갔다. 그것이 우리식 사랑인 정이요, 또 맺힌 한을 풀어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겐 '미운 정'이란 말이 있다. 미우면 미운 것이지 왜 거기에 따뜻한 뜻이 담긴 정이란 말이 붙었을까? 사실 사랑의 복잡한 감정을 이처럼 잘 표현한 낱말도 없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미워졌지만 그렇다고 놓아버릴 수 없는 그 아픈 심정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고운 정과 미운 정이 서로 교차되면서 쌓이고 깊어진 멍울을 '한'이라고 우리는 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정과 한은 서로 원인과 결과일수도 있지만 또 한 몸일 수도 있다. 젊었을 때에는 잘 몰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한'이란 단어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평생 한스러운 일을 겪지 않았고, 또 그것이 내 속에 쌓였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그 아련하고 저릿한 감정이 내 속에서 저절로 동화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한이 담긴 영상이나 음악을 감상할 때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어온다. 내 핏속에 흐르는 정한(情恨)의 농도가 더 진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삶의 과정에서 입게 된 크고 작은 생채기가 아니라 삶의 실체를 알아가는 통찰의 지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풍성해진 감성의 동화작용은 세상을 좀 더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사잇길 이야기가 샛길로 빠져 갈팡질팡해온 것 같다. 나는 사잇길이라고 여겼지만 독자들은 잘 못 들어선 샛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2년 동안 나름대로는 사잇길을 찾으려 했지만 의지만 앞세웠다는 후회를 하게 된다. 뜻은 그럴싸했는지 모르지만 속은 텅 비었다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독자들의 공감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하지만 무엇인가를 향해 골똘히 사색하는 과정이 좋아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굳어버리거나 나만의 좁은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으려한다.

그 동안 부족한 글을 감내해준 독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아울러 이 지면을 허락해준 충북일보에게도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 다음 사람에게 사잇길을 찾는 과제를 넘기며 더 재미있고 다양한 사잇길 이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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