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 오면

2016.06.02 15:37:12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교수

짧은 오월이 지나가고 벌써 유월이다. 상큼했던 공기가 후텁지근하게 바뀌고 한껏 뜨거워진 햇볕과 붉게 핀 장미가 여름의 시작을 알린다. 유월에 들어서면 계절의 변화보다 맵싸한 전쟁의 잔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평생 군인이었기 때문일까?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베이비붐 세대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들었던 남북대치의 상흔들이 유월이 오면 기억의 저편에서 되살아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의 주인공 세대는 아닐지라도 뜨거웠던 그날의 아픔이 나의 핏속에도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 살던 친척 형이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통지서를 받던 날도 어느 해 유월이었다. 그날은 온 동네가 들판에서 태우던 보리티끌의 자욱한 연기에 휩싸여 초저녁부터 등불을 켜야 했다. 그 매캐한 연기가 마치 전장에서의 포연(砲煙)처럼, 묘비 앞의 향연(香煙)처럼 해마다 이맘때쯤 코끝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유월이 오면 국립현충원을 찾게 된다. 그곳엔 내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많은 선후배 조종사들과 동기생들이 잠들어 있다.

사관생도 2학년 때의 유월이 생각난다. 현충일을 맞이하여 몇몇 동기생들과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갔을 때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묘역에서 절규하는 소복차림의 중년여인을 만났다. 몇 주 전 불의의 비행사고로 순직하여 묘지석이 되어버린 아들을 쓰다듬으며 울고 있는 어머니였다. 그 순직조종사는 생전의 모습이 생생한 선배님이었고, 이제 막 임관한 '소위'였다. 어머니는 생도제복을 입은 우리들의 손을 붙잡고 한없이 슬픈 눈물을 흘리셨다. 그날 비로소 내가 군인의 길을 걷고 있음을 실감했다. 빗속에서 절규하고 있는 그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군인의 길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긴 일기를 남겼다.

오륙 년 전 대대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비행사고로 순직한 고(故) 오충현대령도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역시 비행사고로 순직한 동기생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뒤 10년 후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듯 일기를 썼다.

'내가 죽으면 가족은 내 죽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담담하고 절제된 행동을 했으면 좋겠다. 장례는 부대장(部隊葬)으로 치르되, 요구사항과 절차는 간소하게 했으면 한다. (…) 조국이 부대장을 치러주는 것은 조종사인 나를 조국의 아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족의 슬픔만 생각하지 말고 나 때문에 조국의 재산이 낭비되고 공군의 사기가 실추되었음을 사과해야 한다. 군인은 오로지 '충성'만을 생각해야 한다. 비록 세상이 변하고 타락한다 해도 군인은 조국을 위해 언제 어디서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전투조종사의 운명이다.'

우리는 동고동락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 본래의 초심으로 돌아가게 되나 보다. 전장에서 실전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하면, 처음엔 총알이 날아올까 두려워 벌벌 떨다가도 옆에 있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는 순간,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진하게 된다고 한다. 군인을 군인답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동료의 죽음이란다.

날개를 나란히 하고 하늘을 날았던 동료조종사의 묘비 앞에 서면 현재의 내 모습을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보게 된다. 오늘 그들의 묘비 앞에 내가 서 있지만 어쩌면 그 묘비의 주인이 '나'일 수도 있었음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의 내 삶 속에는 먼저 간 동료들이 이어가지 못한 삶의 조각들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죽음을 통해 얻게 되는 비행 사고에 대한 경각심과 살아있음에 대한 자각이 내 심장을 더 열심히 뛰게 한 것이 아닐까.

모윤숙 시인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제목의 긴 시를 남겼다. 국립현충원에 가면 나라를 지키다 먼저 가신 호국영령들이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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