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은체하다

사잇길

2020.03.12 17:03:15

이두희

중원대학교 초빙교수

알은체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친근감의 표시란다. 라디오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정말 그럴까?'하는 의아함이 솟았다. 하지만 곧바로 이 말의 뜻을 이해했고 공감이 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혼자 서먹서먹한 기분으로 서 있을 때, 누군가가 알은체하며 다가와 말을 건네면 무척 반갑고 고맙다. 굳어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주변 분위기에 온기가 돈다. 알은체의 반대는 모른 체이다. 나는 그 사람이 반가워서 알은체하려고 다가가는데 그 사람은 나를 모른 체하며 지나쳐 버리면 기분이 어떤가? 처음에는 민망스럽다가 그 다음엔 서운하고 나중엔 괘씸하기까지 하다. 그 찬바람 도는 상황을 생각하면 알은체가 얼마나 '친근한 배려'냐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알면 반가워하고 모르면 그냥 지나치는 것이 상례인데 '알은체하다'는 말은 그냥 지나치기가 미안해서 인사치례를 한다는 어감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인심이 표면적이고 형식적이어서 그 정도로도 인간관계 유지에 충분하다는 것일까? 어쩌면 '안다'라고 표현하기가 정말 조심스러운 세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지식이나 사람을 '안다'라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그 말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허구적인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안다'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심지어 평생을 같이 살아온 배우자인데도 말년에 가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고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도 쥐꼬리만 한 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아는 척 해왔지만 한 발자국만 깊이 들어가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지식이고 기억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안다'가 아니고 '알은체하다'는 말이 더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안면은 있지만 이름이 금세 떠오르지 않거나 어떤 인연으로 만났던 사람인지 명확하지 않을 땐 그저 알은체하는 것이 최선일 수가 있다. 자칫 친한 척 과도한 반가움을 표시했다가 혼자 머쓱해 질 수 있고 속된 꿍꿍이를 가진 것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방송에서 맨 처음 시작의 말로 이 말을 꺼낸 아나운서는 꽃샘추위가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어디에선가 꼼지락대며 다가오고 있는 봄을 알은체하며 맞이하자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봄을 알은체하자'는 말, 무척 신선하고 감각적인 표현으로 귀를 자극한다. 봄을 알은체하며 맞이하면 멈칫거리던 봄이 더 반갑고 친근한 느낌으로, 좀 더 빨리 다가올 것이란 설정이 가슴 설레게 한다.

사실 봄이란 계절의 오고감은 자연의 변화보다 심리적 감성이 더 크게 작용한다. 춘삼월에 접어들며 낮 기온이 치솟기도 하고 하루 종일 내리는 비가 '부슬부슬'이 아니라 '추적추적' 내리는 데도 아직 봄을 말하기에는 민망하다. 거리에는 하나 같이 얼굴을 감싸고 두툼한 외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걸어간다. 그나마 밖으로 나다니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다. 어지간하면 집안으로 꽁꽁 숨어들었다. 뜰 안의 산수유가 꽃봉오리를 조심스럽게 터뜨리며 애써 봄을 전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 체하고 있다.

봄도 봄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을 경원시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슬프다. 이른바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라는 말이 인간사회의 종말을 예고하는 말 같기도 하다. 산문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교수는 감방에서의 여름나기가 제일 힘들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좁은 감방 안에서 칼잠을 자야할 때, 옆 사람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배척하고 밀어내야 하는 여름이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고 적었다. 싫건 좋건 서로의 몸을 밀착하고 껴안으며 잠을 자는 겨울감방살이가 그나마 더 낫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사회 전체가 한 여름의 감옥보다 더 무서운 곳이 되어가고 있다. 무서울수록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 반대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봄을 건너뛰거나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서로 반갑게 악수하거나 안아 주지는 못하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다가온 봄에게 반갑게 알은체라도 하여 이 고통에서 슬기롭게, 하루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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