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갈등

사잇길

2020.01.16 17:51:08

이두희

중원대학교 초빙교수

나이가 들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지금껏 그렇게 해왔으니까 당연하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갑자기 삶의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면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전조현상으로 받아들이거나 심리적으로 쫓기는 이유가 된다. 가족만 빼고 다 바꾸라고 강요하는 요즘 세태에서 관혼상제의 관습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도 나이든 어르신들의 오랜 경험이 깊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바꿔야 한다는 젊은 세대와 이에 저항하는 기성세대간의 갈등은 인류의 집단생활이 시작된 이후부터 계속되어 왔으리라.

처갓집 제사상에는 좀 색다른 관습이 있다. 조상 신위(神位)가 있고 그 옆에 나란하게 성주님(집을 보호해 준다는 신령)을 위한 밥과 국, 수저가 올라간다. 그 뿐만 아니다. 제사상 옆에는 별도의 작은 소반에 밥과 국, 정안수와 수저 한 벌이 놓여진다. 장모님의 말로는 삼신(三神)을 위한 상이란다. 이러한 상차림을 두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장모님과 아들·며느리들 사이에 작은 다툼이 일어난다.

아들은 아버지 제사이니 다른 신들은 모시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고, 장모님은 남편 제사이지만 남편 옆에는 다른 신들도 같이 있으니 그들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장모님은 젯밥을 담을 때도 성주, 삼신, 그다음이 장인어른이다. 제사상으로 인한 다툼이 있을 때엔 사위인 내가 나서서 중재를 해보지만 완강하신 장모님 뜻을 꺾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한 제사냐고 따져도 소용없는 일이다. 장모님 생각으로는 조상신보다 성주신과 삼신의 힘이 더 세기 때문에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집안에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 실존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들을 향해 온갖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일찍 돌아가신 장인어른 대신 혼자서 집안을 지켜온 억척성과 애틋함이 엿보인다.

장모님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만큼 어렵게 느껴졌다. 더구나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큰며느리의 입장에선 무척 껄끄러운 일인데도 완고하신 장모님의 뜻에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고 따라왔다. 그런데 지난번 제사 때 변화의 조짐이 일어났다. 여느 때와 같이 제사상을 차려놓고 늦어진 장손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큰며느리의 어두운 표정에 못내 신경이 쓰였는지 갑자기 삼신용 제사상을 치우라고 하셨다. 이제는 너희들이 알아서 한다고 하니 그렇게 해보라는 말씀이었다. 장남은 눈치를 보다가 이왕 상을 차린 것이니 올해는 예전처럼 지내자고 했으나 장모님은 다시 강짜를 부리셨다. 결국 내가 나서서 조율에 들어갔다.

저렇게 준비된 상을 치우고 나면 그게 또 장모님의 잠자리를 한동안 괴롭힐 터이니 그냥 놓아두겠습니다. 장모님이 편안해야 저희들의 마음도 편합니다. 그런데 내년부터는 처음 준비할 때부터 저희 의견에 따라 주십시오. 제사는 장인어른을 기리는 한편 자손들이 모여서 우의를 돈독하게 하는 자리이지 온갖 신들을 모셔서 집안의 우환을 없게 해달라고 비는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장인어른 입장에서도 그렇잖습니까. 가족들 앞에서 혼자서 먹고 싶지 장인어른보다 더 높은 귀신들과 함께 진지를 드시고 싶겠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신 장모님은 그건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해는 가지만 바뀌기는 어렵다는 것을….

소설가 김훈은 '삶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험될 뿐'이라고 했다. 사회적 통념이나 이치를 따지는 논리로 삶을 설명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더구나 85년의 고된 경험으로 축적된 장모님의 습성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또 다른 삶의 경험에 의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 장모님에게는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이젠 안심하고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새로운 경험과 그 뒤에 따르는 신뢰가 필요한 것 같다. 모든 갈등의 불씨와 변화의 가능성은 '신뢰'의 문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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