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정표

이두희의 사잇길 사이로

2019.01.03 17:29:52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졸리는 눈을 참으며 새로운 한 해가 열리는 시간을 기다렸다. 예전에는 이 시간이 다가오면 꼭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두근거렸었는데 지금은 그저 밋밋하다. TV에 방영되는 제야의 종소리가 여운도 없이 둔탁하게만 들리고 종을 치는 사람들의 하얀 입김은 그냥 춥다는 생각만 든다.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던 어린아이가 크리스마스 밤에 일어날 일을 이미 알아버린 후의 기분이랄까? 드라마에서 다음 편의 전개가 빤하게 그려질 때의 그 김빠진 맛이랄까.

 한 살을 더 먹게 된다는 것, 그리고 한 해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봐도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인 순간에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애써서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변화를 향한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삼일이 채 지나기 전에 흐지부지해질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다면 진지해질 수가 없을 것 같다. 전에는 그걸 알면서도 부지런히 계획을 세우곤 했다. 하다못해 일 년 동안 도전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이라도 써 붙여야만 마음이 편했다. 요즘은 TV나 신문에서 떠드는 '새로운 변화'이란 말이 왠지 나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들린다. 이미 습관화된 삶의 틀에 갇혀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언뜻 생각해 낸 것은 옛날 이맘때쯤 세웠던 각오나 계획을 다시 뒤적거려보는 것이었다.

 삼십대 후반 쯤, 작은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돼 살림이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새해 첫날 집에서 떡국을 먹고 놀다가 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지만 희망의 씨앗을 심어보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마침 '주부생활'이라는 여성잡지의 부록으로 가족의 미래를 예상해보는 표가 붙어 있었는데 그 표의 빈칸을 채워보기로 했다. 연도별로 가족의 나이를 계산하고 예상되는 직책과 수입·지출을 따져 내 집 장만은 언제쯤 가능한지 등을 예측하도록 돼 있었다. 몇 년도에 애들이 대학교에 가고 내 나이 몇 살쯤 아이들이 결혼을 할 것이며, 내가 환갑을 맞이했을 때 손자는 몇 살쯤 될 것인지도 상상할 수 있었다. 그 표는 미래에 대한 계획서라기보다 그저 정초에 가족의 소망이나 꿈을 담아 알아보는 토정비결 같은 것이었다. 표를 완성해놓고 보니 제법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혹시 더 이상 진급이 안 돼 이른 나이에 전역을 해야 한다면 작은 아이의 대학 등록금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교육보험을 들기로 했다. 꼬박꼬박 모은 돈으로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도 까마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그 표는 가계부 갈피 속에 들어가 잊혀졌다. 언젠가 짐정리를 하다가 그해의 가계부와 표를 발견해 아내와 함께 감회에 젖은 일이 있다.

 사진앨범이 잔뜩 쌓인 책장을 뒤져 마침내 옛날의 그 표를 찾아냈다. 누렇게 퇴색된 종이 위에 지나간 25년의 삶이 겹쳐졌다. 언제 그날이 올까 싶었던 날들이 대부분 지나가버렸거나 지금 코앞에 닥치고 있었다. 일정표대로라면 제대로 맞추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실행여부로는 이뤄지지 않은 것이 거의 없어 뿌듯했다. 살아가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거나 겪어야 할 일이었으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표가 내 삶의 이정표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집 마련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할 아이들을 생각해서 안정된 주거지를 고민하기도 했다.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급을 해 군 생활을 명예롭게 마칠 수도 있었고, 약간 늦었지만 손자도 봤다.

 살다보면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이정표가 필요하다. 다음 지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알려준다. 외국의 유명 여행지에서 '서울까지 0000㎞'라는 이정표를 만나면 한참동안 그쪽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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