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사잇길

2019.07.18 17:52:09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온다온다 하면서 소문만 무성하던 장마가 마침내 시작되려나 보다. 잔뜩 찌푸린 날씨인데도 후덥지근하여 주변 공기를 움켜쥐고 비틀면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새벽에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려 대더니 오후엔 반짝 하늘이 보였다. 듬성듬성 구름사이로 파랗게 드러난 하늘이 더없이 예뻤다. 텁텁함을 씻어버린 뒤 내리쬐는 햇볕은 따갑지만 우중충한 장마철에도 반짝 틈새가 있어서 한 철을 또 견디게 되나 보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머니는 꿉꿉해진 이불을 내다 말리곤 하셨다. 밤이 되어 바삭한 햇볕의 단내가 스며있는 홑이불을 덮고 누우면 수박처럼 달콤한 여름밤의 꿈을 꿀 수 있었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서는 장맛비를 '매실이 익어갈 무렵에 내리는 비'란 뜻으로 매우(梅雨)라고 한단다. 이 무렵에 익어가는 것은 매실뿐만이 아니다. 매실의 사촌격인 살구도 있고 앵두, 자두, 복숭아 등도 이 시기에 익어가고 또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리 먹음직스럽지도 않은 매실이란 과일을 앞세운 것은 추운 날씨에 봄을 알렸던 매화의 고고한 잔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내 기억 속의 장마는 모내기가 끝나고 벼가 한창 자라는 시기와 맞닿아 있다. 보릿고개에 간헐적으로 내리던 빗물을 모아 간신히 모내기를 마치면 풍성한 장맛비가 내려 벼가 한껏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장마가 끝나고 나면 노릿했던 벼들이 어느덧 시퍼렇게 자라 있었다.

그 해에는 봄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모내기가 늦어졌다. 다행히 가뭄이 곧바로 장마로 이어져 농민들은 서둘러 모내기를 시작했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비라서 반갑기도 했지만 평소보다 시기가 늦어진 탓에 너도나도 모내기에 매달렸다. 그러다보니 점심과 새참은 들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때론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식사를 할 때도 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해 여름 빗물에 밥을 말아 먹어 보았다. 그렇게 전쟁을 치르듯 힘든 모내기를 끝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그해처럼 힘든 시기는 없었다.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다가 실패하여 농사일을 돕고 있던 시기였다. 어린 나이에 경험한 실패도 아팠지만 하루하루 농사일에 지쳐 앞날이 암담하기만 했다. 어쩌면 모든 꿈을 접은 채 시골 농군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다행히 장마가 끝나고 논에 물이 그득하여 벼가 한창 자라기 시작할 때쯤 부산의 이모님 댁으로 떠날 수 있었다. 도회지에서의 재수생활은 삶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길 만큼 힘들었다. 책을 놓아버린 기간이 길어서 제대로 따라가기도 힘들었지만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으스대는 친구들 앞에서 폭우에 휩쓸려버린 벼처럼 기가 꺾였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려오던 꿈을 접고 농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다.

비는 만물을 성장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매화가 지고난 뒤 매실을 키우고 여물게 만드는 것은 뜨거운 햇볕만이 아니다. 애지중지 돌보아 키우는 모판의 벼를 논에다 옮겨 심은 뒤 필요한 것은 풍성한 빗물이다. 열일곱 살 나이에 장마철 같은 아픔을 겪은 나는 스스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어둡고 축축했던 일 년을 통해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인내할 줄 아는 저력을 얻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삶의 일반론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아픔의 연속일 수도 있다. 다만 아픔의 과정에서 무엇을 얻느냐에 따라 성장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마음을 한없이 들뜨게 만드는 흰 눈과는 달리 추적거리며 내리는 비에는 감성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약효가 들어있다. 은은한 음악과 차 한 잔 앞에 앉으면 지나간 시간들이 투명한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린다. 비가 그치면 곧 시작 될 올 삼복더위에는 밀쳐두었던 책을 이번에는 끝까지 읽고 말리라는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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