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2016.08.25 15:21:19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교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특별하다. 생태적 특징을 주고받는 밀접한 관계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수많은 화두(話頭)를 던지는 관계여서 그렇다. 아버지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삶의 지혜를 전해주려는데 아들은 그것을 무의미한 잔소리로, 또는 불필요한 간섭으로 받아들일 때 화두가 일어난다. 나도 그랬다. 올바른 길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아들에 대한 참교육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늘 아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들의 눈에는 나의 좋은 점보다 좋지 않은 점이 더 많이 보였던 것 같다. 서로에게 수많은 화두를 주고받은 후 비로소 가로 놓인 깊은 골짜기가 조금씩 메워지기 시작했다.

심리학자들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경쟁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는 생각이 더 우세하단다. 신경림 시인은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집으로 들어오고, 노름으로 밤을 새기도 하며, 종종 장바닥에서 광부들에게 멱살을 잡히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자랐다. 그 다음날 아버지에게 아무 말 없이 술국을 끓여내는 어머니가 한없이 애처롭게 보였다. 그래서 가족을 힘들게 하는 짓은 일체 하지 않았고, 남에게 빚지는 일이 없도록 열심히 살았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아서 주변사람들에게 늘 당당하고 떳떳한 삶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바라보니 자신은 간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 있더란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던 것이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초라해진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그의 술회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들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기도하다.

유난히 질기고 텁텁한 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 알프스의 몽블랑 트레킹(TMB) 여행을 떠났다. 일행 중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행한 팀도 있었다. 같이 먼 여행길을 나섰다는 것만도 한없이 부러운 일인데, 다정하게 걸어가며 사진도 찍고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 모습은 알프스의 풍경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아버지의 허리통증이 도져서 모든 짐을 아들이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게 되었다. 홀가분해진 차림으로 산길을 걷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몸도 가뿐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아들에게 의지할 수 있고, 무언가 넘겨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없는 기쁨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아버지는 무언가를 아들에게 전수하여 흔적을 남기려는 잠재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것이 무거운 짐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분신이 되어 준 아들에게서 뿌듯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혹시 아버지와 아들간의 일반적인 갈등은 그러한 본능적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실망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공군사관학교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비행기와 한 몸이 되어 교정을 바라보는 동상이 서 있다. 아버지가 비행사고로 순직했을 때 어린 아들은 고작 다섯 살이었다. 홀어머니 아래서 훌륭한 물리학자의 꿈을 키우며 자라던 아들은 어느 날 제복차림의 친구를 만나고는 군인이 되겠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어머니는 한사코 말렸지만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조종사는 절대 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미 들어선 그 길에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아들마저 비행사고로 순직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조종사의 길을 택하면서 아들 스스로 한 말도 운명이었다. 운명이란 미리부터 정해져 있는 대로 흘러간다는 뜻이라면 그들에겐 너무 잔인한 말이다. 차라리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꿈을 꾸고, 같은 방향으로 이끌렸던 것은 유전적 요인이 아니었을까?

요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힘든 전투조종사의 길을 택하는 아들들이 많아졌다. 조종사가 인기직종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좋은 조종사아버지가 많다는 뜻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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