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세대

사잇길에서

2019.09.19 17:39:42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연필을 든 손은 푸근하다. 거친 표면도 생쥐처럼 매끄럽게 빠져나가고, 힘 안 들이고 지나가는데도 뚜렷하게 자취를 남기는 볼펜이 대세이지만 머리에 지우개를 달고 있는 연필이 더 임의롭다.

 닳고 낡아지면 잠시 끝을 다시 벼리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막간의 틈이 있어서 숨을 고르고 몸에 힘을 뺄 수 있다. 한나절 내내 개미구멍처럼 좁아져있던 생각이 다시 툭 트일 수 있는 것은 날카로운 칼날로 살을 깎아내고 그 속의 까만 뼈를 조심스럽게 갈아내는 무심(無心)의 시간 덕분이다.

 판을 갈아엎어야 할 만큼 이건 아니다 싶을 때에도 제 몸을 바치는 지우개로 쓱쓱 지우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인간적이다.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안고 있어서인지 행간의 논리들이 서로 다투려 하지 않는다. 잘 지워지지 않는 글씨라도 연필의 부드러운 첨삭 기호를 빌리면 즉시 바로잡히거나 흐르는 시간에게 맡길 수 있다. 연필은 기존의 글에 간섭과 지적을 하면서도 자신을 돋보이게 내세우거나 우기지 않는다. 언제든지 지워져 물러설 각오가 되어있다.

 글쓰기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침을 묻혀가며 꾹꾹 눌러쓰던 기억 때문일까. 연필을 잡을 때면 흐릿한 동심(童心)이 다시 일어난다.

 초등학생 시절 필통 속에 잘 깎인 두세 자루 연필이 들어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의 관심과 사랑이 가지런하게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연필은 늘 부엌칼이나 과도로 쥐어뜯듯이 깎아 연필심만 억지스럽게 내밀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예쁜 글씨가 나오려면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야 하는데 무딘 칼은 그나마 드러낸 까만 심을 댕강 부러뜨리기 일쑤였다. 그냥 뭉툭한 끝에 침을 묻혀가며 쓸 수밖에 없었다. 누렇고 거친 종이에다 뭉툭한 연필 끝으로 한 글자씩 새겨 넣듯 글을 쓰는 일은 중노동에 가까웠다. 가운뎃손가락 마지막 마디의 여린 살이 움푹 들어갈 만큼 꾹꾹 눌러서 숙제를 하고 받아쓰기를 했다.

 어느 한 부분에 지나친 힘이 들어가면 사달이 생기는 법이다. 온 손가락에 힘을 주다 보면 연필심 뿌리 부분이 뚝 부러졌다. 그러면 다시 멀쩡한 살을 푹푹 잘라 내고 숨어들어간 까만 심을 파내야 했다. 내가 가진 연필은 그렇게 얼마 써보지도 못하고 몽당연필이 되었고 수시로 새 연필을 사달라고 졸라야 했다. 아마 부모님은 내가 다른 형제들보다 두세 배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어느 날 고모가 사다 준 빨간색 연필에 대한 애착은 차라리 천형(天刑)이었다. 몽당연필이 되어 좁은 필통의 한자리를 떡 차지하고 있었지만 버릴 수가 없었다. 더 깎아내면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고 버리자니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이 아까운 '계륵(鷄肋-닭의 갈비)' 같았다.

 삼국지의 조조가 한중 땅을 놓고 전쟁을 하던 중 부하 장수에게 내린 암호가 계륵이었다. 영특했던 장수는 조조가 내린 암호의 뜻을 재빨리 알아채고 철수를 서두르다가 너무 앞서갔다는 죄로 처형당했다.

 조조도 그러했거늘 어린 마음에 계륵을 포기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몸통에 새겨진 '문화연필'이란 금색 글자가 남아있는 한 쓰레기통이나 아궁이 속으로 던져 넣을 수 없었다. 결국 필통 속에서 한동안 딸각거리다가 책상 서랍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언제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자취를 감추었다.

 오래된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은 인생이란 긴 연극에서 비록 조연이거나 작은 소품에 지나지 않더라도 극의 흐름에 있어서 꽤 무게 있는 역할을 한 결과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연필처럼 긴 시간 동안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내 곁을 지켜온 물건도 드물다. 이제 머릿속 생각이 손을 거쳐 활자화되는 과정이 달라져 쓸모라는 측면에서는 퇴장의 시기가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든지 자신의 뜻을 양보하고 지워져도 좋다는 헌신의 모습과 조심스럽게 깎아내고 다듬어야 하는 삶의 자세를 깨우쳐 주는 역할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늘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짧은 내 기억을 저장하고 내 생각의 오류를 고쳐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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