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질

사잇길에서

2020.04.16 16:50:32

이두희

중원대학교 초빙교수

얼마만인가? 마당을 쓰는 대빗자루 소리를 들어본지가….

"쓱~싸악~, 쓱~싸악~"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공원 산책길에서 이 소리를 들었을 때 잠시 딴 세상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기다란 빗자루로 무언가를 힘차게 쓸어내고 있는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면서 아마도 요즘 흔한 플라스틱 빗자루일터인데도 그 소리가 자못 정겹고 맑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시간에 무엇을 저렇게 열심히 쓸고 있을까· 다가가는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속없이 불어대던 봄바람에 어지러이 흩어진 것은 수북했던 지난해 가을 낙엽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지기 시작한 꽃잎들과 꽃봉오리를 감싸고 있던 꽃받침 같은 봄의 흔적들도 꽤 있었다. 벌써 봄이 쓸려나고 있는가·

비질은 무언가를 한쪽으로 모으는 행위이다. 쓸모없는 것이라면 버리기 위한 비질일 터이고, 알곡과 같이 소중한 것이라면 갈무리하기 위한 비질이다. 행위의 목적이 다르므로 비질을 할 때의 느낌 또한 전혀 다를 것 같지만 실제 비질을 해본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등과 이마에 땀이 살짝 나도록 비질을 한 후 뒤돌아서서 빈 마당을 바라보면 비움을 향한 것이건 채움을 향한 것이건 비질이 주는 뿌듯함은 서로 맞닿아 있었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적, 시골집에 간 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었다. 형제들이 다 모이는 날에도 그 일은 양보하지 않고 으레 내 일인 양 여겼다.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대빗자루는 제법 묵직하였다. 바싹 마른 대나무 잔가지들을 모아 다발로 묶고 약간 굵은 대나무로 자루를 만들어 넣었다. 보기에는 억세고 성긴 모습이었지만 가느다란 잔가지들의 탄력으로 인해 끝은 섬세하고도 옹골졌다. 집안의 음달지고 구석진 곳곳을 샅샅이 훑어내는 대빗자루의 힘을 다른 것으로는 따라갈 수 없었다.

빗자루에 쓸려 모아지는 것은 대개 삶의 흔적들이었다. 집안의 감나무 낙엽과 잔돌도 많았지만 콩이나 벼와 같은 곡식 알갱이들도 있고 조카들의 장난감, 종이 쪼가리, 몽당연필과 지우개 같은 학용품도 있었다. 드물게는 동전도 그늘진 곳에 숨어 있다가 낚싯대처럼 휘청대는 빗자루 끝에 걸려 마당 가운데로 나왔다. 그것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생활의 가운데에서 밀려나 잊힌 것들이어서 작은 연민과 정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아침 일찍 마당을 쓸면 집안 전체가 환해지는 효과와 더불어 온 집안사람들을 깨우는 덤도 있었다. 대빗자루가 내는 청량한 소리는 귀를 자극하여 더 이상 잠자리에 누워있기 힘들게 했다. 모두들 부스스 일어나 마루로 나오면서 시골집의 하루가 시작되곤 했다.

큰 빗자루 비질은 아마도 산중의 스님만큼 고수가 있을까 싶다. 스님들은 새벽마다 절마당을 쓸어 가람을 깨끗이 한단다. 그것이 절집의 일상이면서도 중요한 행사인 것은 수행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어느 스님은 평생 마당을 쓸다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단다. 커다란 빗자루가 마당뿐만 아니라 마음의 바닥을 끊임없이 쓸어내고 닦아내게 되어 마침내 심신이 청정해지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처럼 비질을 하는 것은 단순한 청소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음을 나도 경험하였다.

시원한 비질 소리가 난 곳은 공원의 화장실 앞이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산책로로 이어진 길과 화장실 앞마당을 쓸고 계셨다. 공원관리를 맡고 계신 분인지 아니면 봉사로 그 일을 하는 분인지는 모르지만 그분의 얼굴을 마주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분이 들고 있던 빗자루도 내 상상을 깨고 매끈하게 잘 묶은 대빗자루였다. 나도 오랜만에 비질을 해볼까 했지만 그분의 우려 섞인 표정에 단념하고 가던 길로 돌아섰다. 그분도 옛날 나처럼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돌아서자 다시 시작된 대나무 빗자루의 경쾌한 음악소리는 어느 새 내 속의 마당도 깨끗이 쓸어버렸다. 마스크를 벗고 신선한 아침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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