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자랑

사잇길

2020.05.14 17:26:34

이두희

중원대학교 초빙교수

그날은 유난히 눈이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아침을 먹은 후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 안과병원으로 갔다. 평일이었는데도 제법 많은 분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진찰 결과, 눈물샘이 메말라 안구주변에 약간의 염증이 생겼단다. 점안액과 안연고를 처방 받아 병원 문을 나설 때 어머니는 내과진료도 받아보고 싶다고 하셨다. 모처럼 나온 김에 가고 싶은 곳은 다 들러서 가자고 말씀드렸다. 평소 자주 다니셨는지 늙수그레한 내과병원 의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별 진찰도 없이 두세 가지 약을 처방해 주었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더니 소화제와 골다공증, 고혈압 약이란다. 진찰을 하기 전 어머니는 셋째 아들이라고 묻지도 않은 답으로 나를 의사에게 소개하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나설 때 어머니의 손에는 약간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은 지팡이 대신 아들의 손을 잡고 읍내 이곳저곳을 걸어가시는 어머니의 발걸음과 표정 속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오랜 군 생활을 마치고 며칠간의 틈을 내어 시골 어머니와 단둘이서 시간을 보낼 때였다. 객지생활에 늘 지쳐있는 것 같고 가끔씩 왔다가 인사치레만 하고 바쁘게 돌아가던 아들이 오늘은 병원까지 동행해주니 어머니는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평소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시질 않으셨지만 그 날 저녁에는 좀 달랐다. 이런저런 주변 친척들의 이야기며 육남매를 키우며 기쁘거나 아쉬웠던 지난 이야기들을 밤이 이슥해지도록 풀어놓으셨다.

사관학교를 나와서 전투조종사가 된 아들을 두었지만 혹시 자식자랑 끝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봐 남들 앞에 내놓고 자랑을 하지 못하셨단다. 뉴스에 비행기 사고란 말이 나오면 온 가슴이 덜컹하셨던 어머니다. 그럴 때마다 속을 다 태우셨지만 먼저 전화하시지는 않으셨던 어머니다. 그렇게 참고 참으며 마음속으로 기도만 했던 아들이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자 비로소 시름을 놓으셨나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갑자기 자식자랑을 하고 싶어졌단다. 높은 계급으로 현직에 있을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범한 아들로 돌아왔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 듯 말 듯하였다.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못내 서운해 하시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서두냐고도 하셨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당신만의 남다른 기대를 안고 계셨던 것이었다. 형 둘과 누나가 좀 뒤늦은 결혼을 하면서 마음고생이 있었는지 셋째 며느리 감은 고르고 골라서 결혼시키리라 생각했단다. 조그만 시골 읍내이지만 자랑을 해도 되겠다 싶은 아들을 데리고 맞선 보는 장소에 나가고 싶었단다. 가끔 전화로 집에 한 번 다녀가라는 말을 스치듯 말씀하셨지만 그 속엔 어머니의 남모르는 바람이 담겨있었던 것이었다. 80년대 초반 무렵, 조종사들은 거의 모두가 부대 내에서 비상대기를 해야만 하는 시절이었다. 군대에 매여 산다는 애처로운 마음에 맞선이야기를 한 번 꺼내보지도 못한 채 마냥 기다리기만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사귀던 아가씨가 있어서 결혼을 하겠다는 허락이 아닌 통보를 받으셨다. 그렇게 한 번쯤 내어놓고 자식자랑을 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작은 소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어머니는 내성적이셨다. 선천적으로 당신자랑은 물론 자식자랑도 못하시는 분이었다. 혹시나 누가 시기라도 할까, 자랑이 빌미가 되어 잘못된 결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소심함으로 전전긍긍하며 속에만 담아두셨다. 그런 아들이 마침내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어미 곁에 와 준 것은 못내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그토록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아들의 손을 잡고 읍내 거리를 걷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할 때 손을 잡고 병원으로 데려가 주는 아들이 있다는 것, 그 아들과 밤늦도록 간직해오던 이야기를 후련하게 풀어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어머니가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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