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보면대에 '환희의 송가' 악보가 펼쳐있다. 곁님이 연말에 많이 연주되는 이 곡을 배우고 싶다며 웃는다. 도에서 솔까지 다섯 음의 선율로만 전개되는 곡이다. 쉽게 악보를 읽을 수 있는 곡이라 생각돼 레슨을 해 주기로 했다. 베토벤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를 배운 후에, 맘껏 즐기며 연주하는 자칭 황혼 피아니스트가 아닌가. 쉽게 페달까지 넣어 가르쳐주겠노라고 뜻을 밝히니, 밝은 얼굴이 된다.
그는 연말이 지나고, 새해를 맞이하면 산수(傘壽)를 지나 팔십 중반 언덕을 향해간다. 황혼에 곡을 배우며 흐뭇해하는 곁님을 상상하며 절로 행복하다. 누구든지 어렵다고 생각되는 악보는 나붓나붓 천천히 연습하다 보면 눈과 귀가 열린다고 할 터이다. 이 또한 삶의 만족과 행복이 되리라.
독일 본에서 태어난 고전 시대 작곡가 루드비히 판 배토벤(Ludwig van Beethoven)을 악성(樂聖)이라고 부른다. '악성'은 매우 뛰어난 음악가를 뜻하는 말이다. 베토벤이 생애에 쓴 곡 모두가 걸작이므로 최고의 음악가로 불린다. 모차르트가 하루에 한 곡씩 작곡하며 많은 곡을 작곡해 '신동'이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베토벤은 신중하게 몇 년씩 걸려 한 곡을 완성했다.
빈의 캐론토너토 극장에서 '합창 교향곡'이 초연됐다. 관객들은 변화된 혁신적인 교향곡에 놀라운 감동으로 경외감을 느꼈다. 그러나 베토벤은 자신이 만든 곡이 연주되는 순간 청각장애가 심해져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베토벤이 지휘자 미하일 움라우트(Michel Umlaut) 옆에 자리하고, 악보를 보며 연주가 제대로 되도록 감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청각장애가 심해 음악 소리를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한 악장이 끝날 때마다 한 남자가 다가가 관객 쪽을 바라보게 했다. 그는 청중들의 열광하는 모습에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관객들은 더욱 함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의 '환희의 송가'를 읽고 감명받아 나온 작품이다. 이 곡에 기악곡을 성악곡처럼 사람의 목소리를 넣어 예술성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특별한 곡이리라.
필자는 연주회장을 자주 찾는다. 그곳은 내 삶의 응원처라고 할 터이다. 귀로 먹는 달콤한 케이크를 맛보는 귀한 시간이다. 연주가 시작되면 내 얼굴의 피부가 긴장되며 팽팽해진다. 음악에 취해 있노라면 큰 소리의 함성이 내게 감성으로 다가오며, 악기들의 외침이 들린다. 내 뇌에서 곡의 주제가 시뮬레이션(Simulation, 복잡한 일·음악을 해결하기 위해 특성을 파악하는 일)으로 바쁘다. 순간 예술인 음악은 내 삶에 생동감을 주고 여백으로 넋을 놓게 하는 황홀함에 빠지게 하는 마약이니까.
'합창 교향곡' 4악장은 기존의 교향곡과 달리 독창, 중창, 합창 등의 성악과 대규모 관현악을 접목한 곡으로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한 '합창 교향곡' 4악장만 따로 '환희의 송가'로 불리고 있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9번 합창'은 1812년부터 구상해 1824년에 완성했다. 그가 30년 이상 고민해 만든 이 곡은 전통의 교향곡 틀을 벗어난 위대한 곡이다.
'합창' 교향곡은 4악장으로 이뤄졌다. 필자는 1악장을 즐겨 듣는다. 웅장하지 않고 언제 시작했는지 모를 정도로 호른의 트레몰로가 살며시 등장한다. 선율이 신비스럽게 다가오며, 마치 어둠 속에서 해가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온다. 2악장은 팀파니가 한몫한다. 보통은 팀파니 두 개의 음정을 다르게 완전 5도로 조율해 연주한다. 그러나 이 곡에서는 갑자기 한 옥타브 음정으로 끼어든다. 대부분의 교향곡 2악장은 느린 듯 멜로디를 분위기 있게 전개한다. 그러나 이 곡은 빠른 스케르조(Scherzo, 해학을 뜻하는 음악용어로 빠르게 격렬한 리듬으로 변화를 준다는 뜻)로 익살스럽게 농담을 거는 듯 들린다.
3악장은 사랑으로 넘치는 아다지오로 느리게 연주된다. 후세 사람들이 인간의 목소리(Voice)를 표현했다고 해석하며 천상의 분위기가 흐른다.
4악장이 시작되면 단순하게 환희의 선율이 흐른다.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환희의 송가'를 통해 음악을 듣는 관객 모두가 하나가 된다. 장엄한 서사시가 흘러간다. 송가(Ode)는 공덕을 기리는 노래 형식이다. 여기에 인류애를 담고 있다. 이 곡은 한 해를 보내며 아쉬움과 새해를 맞는 기쁨이 흐른다. 또 한 가락이 좋아 찬송가에도 나오며, 교회에서 결혼식을 할 때 등장하는 곡이다. 또한 천국에 가길 기원하며 장례식에서도 찬양하는 곡이다.
아침마다 아파트 안방 앞에 있는 작은 화단과 눈인사하며 음악을 들려준다. 30여 종의 꽃과 나무들은 귀를 열고 묵언으로 음악의 맛을 느낀다. 살아 있는 생명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찾지 않는가. 음악이 그들에게 고요한 마음을 안고 힘을 주는 보약이라고 하련다.
화단의 식구들은 산수(傘壽)를 지난 황혼 피아니스트 곁님이 연습하는 베토벤 '환희의 송가'를 수시로 듣는다. 꽃과 나무들은 청각장애를 지닌 '악성 베토벤'이 작곡한 이 곡을 아는 듯, 선율을 그리며 잘 자란다. 이처럼 인간은 물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음악과 같이하는 여일한 삶의 동행자라고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