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본다. 왕 할머니가 된 내 얼굴을 어찌하랴. 검지로 이마를 콕콕 찍어본다. 웃는 모습으로 눈꼬리를 올리며 표정을 톺아본다. 억지로 웃다 보니 주름이 더 깊어진다. 사나운 새 앵그리버드 같다.
언젠가 초등 저학년 수강생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선생님, 눈을 벌에 쏘였어요?' 하며 묻는다. 아니라고 답을 하자 내 위쪽 눈꺼풀을 가리키며, 아프겠다고 한다. 어린 동심에 의문점을 남기며, 학원 안의 큰 거울 앞에서 얼굴을 다시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친구가 얼굴의 점을 제거하는 리프팅 시술과 눈썹 시술을 했다. 몇 달이 지나도 강한 인상이 변하지는 않지만 젊게는 보인다. 나 또한 의사에게 얼굴을 맡겨볼까. 눈 위쪽 눈꺼풀뿐만 아니라 눈 아래도 불거진 작은 혹처럼 돋아나 살이 찐 듯 보여 흉하다. 나잇값 주름인데 세월의 훈장으로 그냥 둘까. 아무도 흉한 눈꺼풀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린 제자가 스승이 걱정되었나 보다. 어찌해야 좋을지 만감이 교차한다.
거울을 보며 소프라노로 맑고 아름답게 '얼굴'을 부르던 선배님 생각을 떠올리며 작은 소리로 불러본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 빛 하늘 아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날으던 지난날/ 동그랗게 (중략)
이 곡은 8분의 6박자의 못 갖춘마디로 심봉석 작사, 신귀복 작곡의 노래다. 리릭(Lyric) 소프라노로 우아하고 서정적으로 부르면 맛을 더욱더 느낄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얼굴'이 사랑받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그리움이 물씬 묻어난다. 또한, 순간의 맛을 느끼며 행복을 찾는 곡이라고 할 터이다. 단순한 듯 흐르는 선율이 황홀함을 준다. 얼굴을 그리며 부르다 보면, 내 마음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가슴도 따뜻해지며, 머리가 맑아지는 특별한 곡이리라.
노랫말을 음미하며, 마음으로 동그라미를 그린 후에 그 속에 얼굴을 그려본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신 저 멀리 계시는 어머니를 먼저 그린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품성을 알 수 있다면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강조하셨다.
초등교사 시절, 첫 발령을 받고 담임했을 때 유난히 눈이 컸던 아이가 떠오른다. 아버지 사업 실패로 부모가 갑자기 사라졌다. 해가 어둑어둑 넘어갈 때 지인이 집 앞에서 부모를 찾으며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아이가 안타까워 담임인 나에게 전화로 알렸다. 결혼 전이라 내 마음대로 아이를 데려올 수 없어 부모님께 허락받고, 엉엉 울던 제자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몇 달 후 그 아이 엄마가 학교로 찾아와 눈물이 글썽이는 딸을 데리고 갔다. 잠깐 돌보던 제자이지만, 잊지 못할 눈물의 얼굴이 떠올라 어디선가 잘 살기를 바라며, 마음으로 그려본다.
얼굴 가리고 야옹 하던 학부모도 떠오른다. 본인 자식을 가르쳐 준 담임에게 얕은 꾀로 속였던 일이 그려진다. 세상 물정을 모르던 나에게 학원 설립할 자금, 학교 퇴직금을 몽땅 가져간 그녀. 지금도 미국에 있을까. 그를 용서했지만, 거울 속 동그라미에 넣어본다. '얼굴에 돼지를 그려 붙이고 달려든다'라는 옛말처럼 염치없는 돼지로 그를 표현해 본다.
몇 달 전 학원장 모임에 참석했다. 오랫동안 학원을 경영했거나 지금도 경영하고 계시는 원장님들 모임이다. 그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무언가 정진하는 의욕이 넘치는 얼굴들이다. 은퇴하시고 산수가 지나신 음악을 하시는 원장님, 얼굴엔 편안한 음악이 아다지오 칸타빌레로 흐르고 있다. 또한 여자 원장님들은 예쁜 화장과 옷차림으로 젊음을 유지하며 마음마저 다스리는 모습이 얼굴에 서려 있다. 이들의 얼굴을 달보드레하고 매력있게 표현하며 그려본다.
수필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87세 나이로 타계하신 조경희 작가를 톺아본다. 그의 작품을 읽고 수필의 방향을 찾으려 했던 나 자신도 돌아본다. 작가가 여학교 시절에 미국에 계신 아버지께 "왜 나를 보기 싫게 낳아주셨느냐"는 항의의 글을 보냈다. 회답으로 "대략 인간은 본시 얼굴이 예쁜 것으로 잘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름다워야 사람 노릇을 한다"고 타이르는 말씀이 생활의 신조가 됐다고 한다.
누가 나에게 얼굴 모양대로 어설프게, 문체와 구성도 맞지 않게 글을 쓴다고 하면 어떨까. 조경희 작가처럼 친구들이 '당신 왜 그렇게 못났소'하며 힘들게 했다면 태연자약(泰然自若)한 기쁨을 얼굴에 그릴 수 있었을까. 그는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이 나이 들면서 더욱 생활의 신조로 자리했다고 한다. 그 말씀은 진리와 진실을 품고 있었다고 '얼굴' 작품 속에 표현돼 있다. 그 수필을 다시 읽으며 거울 속 내 얼굴을 스스럽게 바라본다.
사람은 가지각색 얼굴을 지닌다. 둥근 얼굴, 긴 얼굴, 낯빛이 검은 얼굴, 누런 얼굴, 하얀 얼굴처럼 각각 다르다. '얼굴 못난 년이 거울만 탓한다.'는 옛말이 있지 않은가. 내 얼굴은 어떤지, 어떤 마음이 같이 하는지 모르겠다. 주제를 모르고 마음과 달리 눈치와 꾀로 얼굴에 생쥐가 오르락내리락할까. 얕은 꾀로 '야옹'하는 모습일까. 돼지처럼 욕심이 가득 찬 얼굴일까. 상념에 젖어 거듭거듭 혼자 말로 읊조려 본다.
시나브로 나는 고희를 넘어 산수(傘壽)의 황혼길 중간 역을 가고 있다. 나 자신의 심상을 반추하며 무상하다고 할 터이다. '이 정도의 얼굴이면 되었지' 하며 스스로 만족해 본다. 내 인생의 얼굴 주름 꽃 훈장에 박수를 보내리라. FM에서 '얼굴' 노래가 통기타 음악으로 들린다. 내 삶을 응원해 주는 온기가 감도는 노래로 특별하다. 노래에 꽂혀 따라 불러본다. 내 인생의 겨울에 핀 주름 꽃 훈장으로 행복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