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이다. 가족과 함께 한적한 숲길 따라 길을 걷는다. 비움과 채움의 산책길은 삶의 행로이리라. 입춘을 앞두고 소소리 바람이 봄소식을 전한다. 나뭇잎 하나 없는 나목의 모습이 조금은 아쉽다. 녹음이 가득한 장관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힘든 겨울을 하심(下心) 으로 내려놓은 나목을 보며 황혼기를 살아가는 나 자신을 곱씹어본다.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살얼음 아래로 졸졸 흐르며 봄을 기다리는 소리가 정겹다. 계곡물에 햇볕이 내려앉아 윤슬이 부드럽게 속삭이며 빛난다. 목탁 소리에 취해 걷다 보니 바람 부는 산사의 고즈넉한 모습에 꽂힌다. 곳곳에 서정이 넘친다.
정목 스님이 작사하신 '바람 부는 산사' 찬불가를 떠올린다. 하얀 종이 위에 내 마음도 그려본다. 산의 나목과 산책길에 봄소식 전하는 계곡물을 그릴까. 부처님 성전 절 마당을 그릴까. 한참 동안 사색에 잠긴다. 소나무 위로 아래로 부는 솔바람이 화음 맞추며 적막함을 달랜다. 맑은 바람을 오색으로 그리려 해도 그려지지 않는다. 어찌하랴. 마음과 바람을 그릴 수 없음이라.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흐르며, 살바람의 춤사위에 내 마음을 얹어본다. 돌담 아래 야트막한 돌탑들이 쌓여있다. 누구라도 쌓을 수 있는 작은 돌탑들, 마음속에 비원을 품고 작은 돌조각 하나를 올려본다. 속세를 벗어나 법계의 세계로 들어가 보리라.
조용한 사찰에서 내 영혼 깊은 곳을 들여다본다. 산사의 바람이 알려준다. 세상의 온갖 것을 가지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그러면 나 자신을 볼 수 있다고. 추임새를 넣는 솔바람이 선지식이라고 품어 본다. 지금 떠올린 삼라만상을 모두 그리려는 마음도 탐심이리라. '욕심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함경' 속에 산사의 바람이 머물며, 법문해 준다.
무심히 피고 지는 작은 봄꽃으로 상상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그들은 기다림으로 재촉하지 않고 피고 진다. 봄을 맞으려고 땅을 헤집고 뾰족하게 내민 풀꽃이 보인다. 작은 꽃이 앙증스럽게 귀엽다.
쌩쌩 불던 재넘이 바람이 어느새 봄기운 명지바람이 되어, 산사를 감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매서운 바람처럼 어려움이 찾아와도, 어느 날 따스한 바람으로 바뀌며 살아가지 않는가. 언젠가 사찰 순례에서 들은'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때라도 원망하지 않으며 분노하지 않는다'라는 법문을 다시 새겨본다. 원망 또한 어려움도 한순간 돌리면 상쾌한 바람으로 돌아오리라.
지나가는 등산객이 돌탑 위에 작은 돌을 얹는다. 골바람이 불어도 인연으로 쌓은 돌은 쉽게 떨어지지 않으며 자리를 지킨다. 이처럼 인연은 지금의 한 생각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 살얼음 사이로 흐르는 냇물이 귀를 열어준다. 살바람 또한 내 마음을 청정하게 열어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인연이 쌓아준 오소소 한 행복이라고 하련다.
정목스님의〈바람 부는 산사〉 노랫말을 의미로 새겨보며 불러본다.
아무것도 없는 종이 위에 산을 그려도
바람은 바람은 그릴 수 없어
벽을 향하여 참선하는 님의 모습 그려도
마음은 마음은 그릴 수 없네
솔바람이 우우우 잠을 깨우는
산사의 바람 소리가 들릴 뿐
마음은 그 어디에도 없어라
내 영혼 깊은 곳을 적시는
산사의 바람 소리 산사의 바람 소리
이 노래는 정목스님 작사, 정경철 작곡의 찬불가다. 합창곡으로도 편곡돼 있어 불교 합창단을 가르칠 때 단원들과 즐겨 부르던 곡이다. 이 곡은 못갖춘마디로 시작되는 네 박자의 찬불가로, 모든 이가 부를 수 있도록 어렵지 않게 작곡됐다. 부르다 보면 우리 가곡의 느낌이 온다. 노랫말은 비구니 정목스님의 티 없이 맑은 얼굴과 조용한 성품을 품은 곡이라고 느껴진다. 노래 속에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소리가 바람 소리와 함께 화음을 맞추며, 절집을 그려준다. 마음이 평온해지며, 청정한 감정을 갖게 된다.
바람 부는 산사를 조용히 부르며, 음악과 함께 생활해 온 나 자신이 삶의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어찌 설명하랴. 어떤 마음으로 여행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맛이 다르듯이, 부르는 노래 또한 여여하게 음악의 맛이 달라진다고 할 터이다.
모든 영역에서 음악의 울타리는 매우 견고해 많은 사람이 쉽게 드나들기 어려웠다. 요즘 젊은이들을 본다. 아이돌의 그룹 메아리, 트로트 왕자와 공주들이 울타리에다 그릴 수 없는 마음의 쪽문을 만들기도 하고 뛰어넘기도 한다. 젊은 음악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풀어주며, 정신적인 치유를 해주고 있다. 그들을 따라 시대의 흐름을 타고 특별한 마음으로 '바람 부는 산사'를 다시 불러본다. 찬불가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본다.
가족과 함께 바람 부는 산사에서 지친 일상의 위로를 얻는 순간이다. 찬불가는 노랫말과 가락이 여법하다. 마음을 뒤흔들어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나 또한 푸석푸석한 마음을 정리해 본다. 마음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어느 것도 순리를 역행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이제야 내 마음속에 물기가 돌고 있지 않은가. '바람 부는 산사' 찬불가를 부르며, 사량(思量, 마음을 헤아린다)의 푼더분한 마음 랩소디를 들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