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영의 '음악이 흐르는 수필' - 그라지오소로 부는 바람

가곡 '아 가을인가'

2023.11.06 16:10:18

김숙영

수필가·음악인

소슬바람에 가을이 묻어 떠나고 있다. 가을은 떠돌이의 계절인가 보다. 나뭇잎이 서걱서걱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깊은 가을, 계룡산 동학사 산책길로 향한다. 오르막이 완만한 등산길이라고 할까. 아름다운 자연과 산뜻한 공기가 무거운 머리를 가볍게 해준다. 절을 향하여 가는 길에 사부랑 사부랑 쌓여 있는 단풍잎이 아름답다. 옆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이 편해지며 속까지 뻥 뚫린다.

걷다 보니, 그라지오소(grazioso· 음악의 나타냄말로 '우아하다'를 뜻한다)로 우아하게 부는 바람이 햇살과 함께 가을을 싣고 내게로 온다. '아 가을인가' 가곡이 뭉클 떠오른다. 여고 시절 친구들과 부르던 가곡이다. 음악 선생님이 입은 자연스럽게, 이마에 소리를 모으고 호흡을 조절하라고 하신 말씀을 곱씹어 본다. 한국가곡은 우리말로 된 시에 아름다운 선율이 붙은 우리의 정서에 친근한 노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전만큼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가 쉽지는 않다. 이 곡은 한국가곡 100선에 들어 있는 노래로 김수경 시, 나운영 곡이다.

동학사 일주문 주변에 단풍이 절정이다. 남녀노소가 마스크를 쓰고 손 전화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는 모습이 훈훈하다. 빨강, 노랑, 다홍 색감과 갈색 낙엽이 어울려 운치 있는 가을 모습이다. 관음암과 길상암이 보인다. 오랜만에 만나는 암자의 모습이 반갑다. 누각을 보니, 항상 하심으로 기도하시던 친정어머님이 보고 싶다. 어머니 손 잡고 동학사를 찾던 생각에, 저 멀리 부처님 곁으로 가신 어머니가 내 곁에 계시는 듯 더욱 그립다. 옆으로 졸졸 흐르는 계곡물이 초록빛과 붉은빛 나뭇잎으로 어우러지며 수장되어 알록달록 아름답다. 작은 언덕에는 억새들이 가을바람에 간들간들 흔들린다. 한참 바라보니 늦가을 이슬처럼 차가운 느낌이 오며 서글퍼진다.
동학사 입구에 왔다. 담장 너머 단풍잎이 알록달록 물감을 쏟아 놓은 듯, 색감이 아름답다. 다양한 색감은 어머니 품속을 그리며 한참 동안 나를 머물게 한다. 대웅전에서 목탁과 불경 읽는 소리가 그윽한 가을 노래로 마음속에 펼쳐진다. '물소리 바람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그것은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이고,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딘가를 깨우쳐 줄 것이다.' 법정스님 '물소리 바람소리'에 나오는 문장이다. 스님 법문처럼 단풍은 물소리의 깨우침으로, 마지막 길을 찾아 계곡 물 속에 영원히 잠들었나 보다.

아름다운 단풍이 무언가 삶의 덤을 주고 있다는 생각에 특별하다. 절 지붕 끝에 매달린 풍경이 우아한 가을바람을 맞아 은은한 소리를 선사한다. 종각에 쏟아지는 파란 하늘이 수려한 산세를 그리고 있다. 황혼 길을 가는 나에게 경사도 없고, 험하지 않은 산책길이 무릎에 무리가 없어 건강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산책 길가에 있는 느티나무 잎이 떨어져 나목이 되어간다. 산은 때 묻지 않은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산길에 가랑잎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무성하던 잎들이 시름시름 아파하며, 하심으로 떨어져 쌓인다. 계절의 질서 속에 생명의 흐름을 엿보고 있다. 나무에 매달린 한 잎, 두 잎을 보라. 생명의 질서 앞에 담담해진다. 때가 되면 스스로 바람에 하르르 떨어지며 무너져 버리지 않는가. 고희가 넘어 황혼 길을 가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단풍처럼 아름다운 시절이 가고, 시나브로 낙엽의 계절로 노년을 맞이하고 있다.

인간이 일상에서 직위를 상승하고 물러남이 나목이 되는 것과 다름이 없으리라. 인간에게 자연이 주는 교훈은 선지식으로 깨달음을 알려준다. 조용한 자연의 질서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무량겁을 두고 반복되고 있다고 할 터이다. 우리의 벗어날 수 없는 생로병사의 삶 또한 자연에서 배울 바가 크다는 생각이다.

한 생각의 여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상이라고 해볼까. 가을이 저물어가며 낙엽이 지고 있다. 내 삶을 돌아보며 다시 시작해 보련다. 비원으로 들끓고 있는 탐심으로 가득 찬 내가 아닌가.

동학사 산책길을 내려온다. 수녀님 몇 분이 맑은 모습으로 산책하신다. 하심의 모습이다. 나 역시 세월의 덧없음을 안으로 새기며 걷는다. 나 자신도 언젠가는 가을 산의 낙엽이 되겠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사색하며 걷는 발을 내려다본다. 어디선가 '아 가을인가' 가곡이 그라지오소로 부는 바람 타고 소프라노로 들리는 듯하다. 치맛자락을 길게 드리운 가을 아가씨가 물동을 이고 가는 모습이 가곡 속에 그려진다.

'아 가을인가/ 아 가을인가/

가을인가 봐/ 물 동에 떨어진/ 버들잎 보고/

물 긷는 아가씨 / 고개 숙이지'

- '아 가을인가' 일부.

눈부시게 맑은 파란 하늘에 가을의 낭만이 흐른다.

아 가을인가. 아 가을인가.

참고 문헌

'고등학교 음악', 금성 출판사.

'한국가곡 200선', 세광음악 출판사.

'음악 대사전', 세광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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